[수도권]“올려보던 싱크대 낮춰주니 설거지 걱정 이젠 덜었네요”

  • 동아일보

서울 마포구 성산동 시영아파트에 사는 김순녀 할머니가 13일 오후 서울시와 한국장애인개발원이 새로 설치해 준 싱크대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두 발을 쓰지 못하는 김 할머니는 18년 동안 이 아파트에서 살았지만 부엌과 화장실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했다. 유성열 기자
서울 마포구 성산동 시영아파트에 사는 김순녀 할머니가 13일 오후 서울시와 한국장애인개발원이 새로 설치해 준 싱크대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두 발을 쓰지 못하는 김 할머니는 18년 동안 이 아파트에서 살았지만 부엌과 화장실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했다. 유성열 기자
■ 서울시, 중증장애인 100가구 주거환경개선 완료

장애정도-행동패턴 고려… 내년도 맞춤형 시공 계획


김순녀 할머니(65)에게 싱크대는 ‘백두산’처럼 높았다. 벽에 걸린 찬장은 한 번도 열지 못했다. 물을 틀어보지 못한 싱크대에는 먼지만 수북이 쌓였다. 가스레인지를 켜는 것은 애당초부터 포기했다. 휠체어에 올라타 팔을 쭉 뻗어도 가스 밸브가 손에 닿지 않았던 것. 방바닥에 둔 휴대용 가스레인지 가스가 떨어지면 설익은 밥을 먹었다. 다행히 화장실에는 바닥까지 닿는 호스가 있어 설거지는 할 수 있었다.

○ 버겁기만 했던 아파트 생활

50cm 높이의 좌변기도 너무 높았다. 팔에 힘껏 힘을 줘 좌변기에 오르다 물기 때문에 미끄러진 적도 많았다. 행여나 물기가 있을까 두려워 볼일을 보기 전에는 열심히 바닥을 닦았다. “화장실 한번 편히 써보는 게 소원이었어.” 13일 오후 18년을 살아온 서울 마포구 성산동 시영아파트에서 만난 김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전북 정읍이 고향인 김 할머니는 세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았다. 지체장애 1급 판정을 받고, 다시는 두 발로 서지 못했다. 그나마 온전한 양팔이 다리가 됐다. 그래도 “돈을 벌어보겠다”며 1970년대 초 혈혈단신으로 상경해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일하며 돈을 모았다. 1991년 드디어 꿈에 그리던 이 아파트를 얻었다.

소중한 보금자리였지만 생활은 불편했다. 화장실에 손잡이를 하나 달고 싶어도 허락을 받아야 했다. 임대아파트라 눈치가 보여 못질도 마음대로 못했다. “내 집이 아니니까 그러려니 하고 살았지 뭐…. 그래도 종로 골목 사글셋방보다는 편했어.”

올해 4월 서울시는 재단법인 한국장애인개발원과 함께 중증장애인 100가구를 뽑아 ‘주거환경 개선 사업’을 벌인다는 공고를 냈다. 전문가들이 장애 정도와 유형, 행동패턴 등을 고려해 맞춤형 시설을 마련해 준다는 내용이었다. 기초생활수급자와 차상위계층으로 장애등급이 2등급 이상이면 혜택을 받을 수 있어 신청서를 내봤다. 며칠 뒤 장애인개발원 안성준 연구원과 시공업체가 실사를 나왔다.

서울시는 기술자문위원회를 열어 사업 대상 가구로 확정하고 예산 340만 원을 배정했다. 아파트 소유주인 SH공사도 공사를 허가했다. 할머니 키에 맞는 걸로 싱크대를 바꾸고, 화장실 바닥을 시멘트와 타일로 돋워 좌변기 높이가 상대적으로 낮아지게 했다. 베란다 바닥도 거실 바닥과 높이를 같게 하고 장판을 깔았다. 가스 밸브와 문손잡이도 손에 닿을 수 있게 새로 달았다. 서울시와 장애인개발원은 내년에도 이 같은 ‘맞춤형’ 사업을 벌일 계획이다.

○ “부엌에서 설거지도 할 수 있어”

이날 할머니는 연방 미소를 지으며 앉은 채로 설거지통을 내려다봤다. 설거지통은 촉촉이 젖어 있었다. 할머니는 그릇 몇 개를 자꾸만 헹구고 손을 씻었다. 팔을 뻗어 한결 낮아진 가스 밸브도 돌려봤다. 눈높이까지 낮아진 찬장에는 차곡차곡 그릇을 넣어뒀다. 좌변기에도 편히 앉았다. 새로 깐 타일은 물기가 있어도 미끄러지지 않았다. 할머니는 한결 편한 동작으로 베란다에 나가 창문도 열어봤다.

안 연구원이 “또 필요한 건 없으시냐”고 묻자 할머니는 방충망을 가리켰다. “구멍이 숭숭 났는데 너무 높아서 바꾸질 못하고 여름에도 창문을 못 열었어. 이것 빼고는 이제 정말 없어.” 안 연구원이 “교체해 드리겠다”고 말하고 집을 나섰다. 할머니는 한 팔씩 내디디며 ‘걸어서’ 배웅을 나오며 말했다. “나는 이제 됐으니까 다른 장애인들도 혜택을 받았으면 좋겠어.” 말을 끝내고 돌아선 할머니는 신기한 듯 싱크대 수도꼭지를 자꾸만 틀어봤다.

유성열 기자 ryu@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