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고형량’ 밝힌 판결 절반도 안돼

  • 동아일보

양형기준제 시행 4개월… 1심 1385건 분석

#1. A 씨는 귀가하는 여성 B 씨를 뒤따라가 강제로 집에 들어가 성폭행하려다 B 씨가 반항하자 주먹을 휘둘러 전치 4주의 중상을 입힌 뒤 상품권을 빼앗아 달아났다. 법원은 강간상해 및 특수강도 혐의로 기소된 A 씨에게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했다. A 씨의 범죄는 현행 양형기준에 따르면 권고형량이 징역 4년∼7년 6개월에 해당한다. 하지만 법원은 성폭행이 미수에 그쳤고 같은 전과가 없다는 점, 잘못을 뉘우치고 있으며 공탁을 한 점을 이유로 권고형량의 하한보다 낮은 형량을 선택했다.

#2. C 씨는 혼자 사는 여성 D 씨의 집에 숨어들어 가 D 씨를 주먹으로 때리고 위협해 3시간 동안 5차례에 걸쳐 성폭행했다. D 씨는 C 씨를 처벌해 달라는 뜻을 분명히 밝혔지만 법원은 C 씨에게 주거침입강간죄의 양형기준(징역 4∼6년)보다 낮은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했다. C 씨가 20대로 아직 어리고 전과가 없다는 등의 이유였다.

살인, 강도, 성범죄, 뇌물, 횡령, 배임 등 8개 범죄에 대해 도입된 양형기준제가 일선 법원에서는 아직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6일 대법원과 대검찰청에 따르면 7월 1일 이후 기소돼 10월 31일까지 선고된 양형기준제 적용대상 1심 사건 1385건(피고인 수 기준) 가운데 판결문에 권고형량 범위를 표시한 것은 전체의 절반에 못 미치는 679건(49.0%)으로 집계됐다. 권고형량 구간을 판결문에 표시하는 것이 법적 의무사항은 아니다. 하지만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공정하고 객관적인 양형을 실현하려는 양형기준제의 도입 취지에 비춰보면 재판 당사자들은 형량이 어떻게 결정됐는지 알 수 없는 판결문을 받아 보고 있는 셈이다.

초등생 S 양 성폭행 사건인 일명 ‘나영이 사건’에서 나타난 법원의 온정적 양형 경향도 여전했다. 권고형량 범위를 판결문에 표시한 679건 가운데 형량 범위를 벗어난 사례는 모두 56건이었다. 이 중 상한보다 높은 형을 선고한 사례는 3건이었고, 나머지 53건은 권고형량 하한보다 낮은 형이 선고됐다.

선고형량이 하한보다 낮은 53건 중 17건은 양형기준을 벗어난 판결을 할 경우 그 이유를 판결문에 적도록 한 법원조직법 규정을 어기고 아예 양형 이유를 적지 않았다. 또 이유를 적은 판결문도 대부분 A 씨나 C 씨 사례처럼 이미 양형기준 안에 포함돼 있는 특별 또는 일반양형인자를 그대로 적어놓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는 특별한 사정이 있을 경우 그 이유를 판결문에 적고 권고형량 구간을 벗어나 선고할 수 있도록 한 제도의 취지에 어긋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아직 시행 초기이므로 더 두고 보자”는 견해이다. 미국 연방법원의 지난해 판결 중 선고형량이 권고형량 범위 안에 든 사건이 59.4%에 불과했던 점을 감안하면 현재 일선 법원의 양형기준제 이행 상황은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전성철 기자 daw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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