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시험 2차 합격한 시각장애인

  • 입력 2008년 10월 22일 00시 11분


"시력을 잃고 나서도 시험 준비하느라 변변한 재활교육을 못 받았어요. 아직 혼자서는 밥 먹으러 외출하지도 못하는데, 세상 밖으로 나가려면 걸음마부터 배워야겠어요."

시각장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사법시험 2차 시험에 합격한 최영(27·서울대 법대 졸) 씨는 21일 6차례에 걸친 도전 끝에 법조인의 길에 들어서게 된 데 대해 "갑자기 찾아든 시련에 꿈을 접을 뻔 했는데, 운이 좋았다"며 이 같이 소감을 밝혔다.

최 씨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된 1998년 봄, 시력이 급격히 나빠지자 병원을 찾았다가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시야는 차츰 좁아졌고, 야맹증세도 생겼다. 좋아하는 산책을 못하게 된 것은 물론 사람이나 장애물을 보지 못해 부딪히거나 넘어지는 일도 잦아졌다.

대학에 들어간 뒤에도 시력은 더욱 나빠졌고, 이 때문에 2003년부터 시작한 사법시험 준비도 여의치 않았다. 최 씨의 시력은 급기야 책을 가까이서 들여다봐도 한 글자를 겨우 읽기 어려울 정도로 악화됐고 2005년 초 시험 준비를 포기하게 됐다.

하지만 이 때 방황한 1년은 오히려 기회가 됐다. 최 씨는 동기생보다 늦어진 졸업을 준비하다 한 시각장애인 친구로부터 컴퓨터 화면의 글자를 읽어주는 '화면 낭독 프로그램'을 소개 받았다. 점자를 배우지 못한 최 씨에게 책을 볼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최 씨는 시험 준비를 다시 하기로 마음먹고 2006년 1월 시각장애인이 '화면 낭독 프로그램'으로 시험을 치를 수 있게 해달라고 법무부에 요청했다. 최 씨의 요구는 받아들여졌고 그로부터 2년 만에 2차 시험의 문턱마저 넘어섰다.

경남 양산에서 일용직 노동을 하는 아버지가 매달 부쳐주는 50만 원이 채 안되는 돈으로 생활하며 종일 공부만 했다는 최 씨는 "보고 싶은 책을 마음껏 보지 못한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어느 복지재단에서 법학 서적을 텍스트파일로 만들어주었지만, 궁금한 점이 있을 때마다 원하는 책을 찾아볼 수 없는 건 너무나 답답했다. 최 씨는 "출판사들이 저작권을 침해당할까봐 텍스트 파일 제공을 꺼리는데, 시각장애인의 읽을 권리 보장 차원에서 개선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장래 계획을 묻는 질문에 최 씨는 "미국에는 시각장애인 변호사가 많다던데,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알아볼 생각"이라며 "국가정책 자문업무나 시민단체 활동에도 관심이 있다"고 답했다.

전성철기자 daw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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