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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6년 12월 6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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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경복궁 광화문 제 모습 찾기 선포식’이 열려 광화문 복원 작업이 시작되었다. 해체 작업을 위한 가림막도 걸렸다. 가림막은 혜촌 김학수의 ‘북궐도(경복궁 전도)’를 바탕에 깔고 경복궁의 안과 밖에서 바라본 광화문과 원래 방향에 맞춰 복원될 광화문 등 3개의 광화문을 형상화했다.
광화문 복원에 맞추어 서울시에서는 ‘세종광장’도 꾸민다. 광화문 복원과 세종광장 조성은 서울의 한복판을 역사문화 1번지로 바꾸어 놓을 것이 분명하다.
광화문은 우리나라 역사의 영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조선 개국 초에 경복궁 정남쪽에 있었으며 세종 때 광화문으로 이름이 붙여졌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고종 때 중건하였다. 그 후, 일제가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북쪽으로 강제로 이전시켰으며, 6·25전쟁 때 또 다시 소실되어 1960년대 말에 재건한 것이 오늘날 광화문이다.
현재 동아일보사(동아미디어센터)와 길을 잇고 있는 광화문이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도 매우 크다. 4·19혁명과 뒤 이은 군사정변, 1980년대의 반독재 민주화 투쟁, 월드컵 축제 당시의 붉은 악마들의 함성, 그리고 촛불시위 등 광화문은 굽이굽이 역사 현장을 직시하며 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번 복원 작업은 역사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아 보자는 데 의미가 있다. 일제가 비틀어 버린 방향을 제대로 잡아 관악산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하고, 철근 콘크리트로 세워진 문루(門樓)도 옛 방식대로 나무로 다시 세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썼던 ‘광화문’ 한글 현판도 떼어낸다고 한다.
광화문은 민족정신의 표상이다. 미당은 광화문을 종교로까지 승화시켜 예찬했다. ‘광화문은/차라리 한 채의 소슬한 종교,/조선 사람은 흔히 그 머리로부터 왼 몸에 사무쳐 오는 빛을/마침내 버선코에서까지도 떠받들어야 할 마련이지만,/왼 하늘에 넘쳐 흐르는 푸른 광명(光明)을/광화문―저같이 의젓이 그 날갯죽지 위에 싣고 있는 자도 드물다’고 노래하였다.
광화문의 숭고한 모습을 우리 민족의 광명 사상이 깃든 종교와 같이 본 것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순결한 민족정신이 광화문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이렇듯 광화문은 민족적 자긍심의 거침없는 표현이다.
광화문은 조선 역사의 표상이지만 이를 미친 듯이 예찬한 일본 사람도 있었다. 메이지대 교수를 지낸 야나기 무네요시는 일제가 파괴하려는 광화문을 온몸으로 막아 낸 사람이다. 그를 ‘광화문 수호자’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가이조(改造)’라는 잡지에 ‘아, 광화문이여!’라는 글을 써 광화문의 철거를 막았다.
‘오오, 광화문이여! 광화문이여! 웅대하여라. 너의 모습,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 네 왕국의 강력한 섭정대원군이 불굴의 의지로써 왕국을 지키고자 남면의 명당에 너의 주춧돌을 굳게 다졌다. 여기에 조선이 있다고 자랑하듯이.’
2009년 말, 광화문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날 것인가?
백형찬 서울예술대 교수 교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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