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입 열면 다친다”, 입 연 사람은 아직…

  • 입력 2006년 8월 10일 16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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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입을 열면 다칠 사람 많다.”

권력형 비리 등 대형 사건이 터질 때마다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핵심 인사들의 입에서 종종 들을 수 있는 얘기다. 그러나 정작 ‘입’을 열었던 사례는 거의 없고 ‘공포탄’에 그친 경우가 많았다.

지난해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의 불법감청(도청) 사건 당시 이른바 ‘X파일’을 유출했던 안기부 비밀도청조직 ‘미림팀’ 팀장 공운영(수감 중) 씨는 “내가 입을 열면 다치지 않을 언론사가 없다”고 주장했다.

공 씨는 이 자료를 갖고 삼성 측에 “터뜨리겠다”며 돈을 뜯어내려 했으나 미처 도청 자료에 담긴 내용에 대해 입을 열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그가 입을 열게 되면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처벌받게 된다.

전두환 정권 시절 안기부장을 지낸 장세동 씨는 국회 5공 청문회에서 “내가 입을 열면 나라가 위태롭게 된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희대의 어음 사기 사건으로 구속된 장영자(수감 중) 씨는 1989년 구치소에서 국회 5공 특위 의원들에게 “정신만 차리면 털어놓을 말은 많다”고 했지만 역시 털어놓은 얘기는 없다.

장세동 씨 못지않게 장안에 화제가 됐던 인물은 정태수 전 한보그룹 총회장. 그는 1991년 수서지구 특혜분양 사건으로 검찰 조사를 받을 때 “내가 입을 열면 나라가 들썩거린다”며 진술을 거부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2인자’였던 권노갑(수감 중) 전 민주당 고문은 옥중에서 언론 인터뷰를 통해 여권 모 대선 주자의 과거 정치자금과 관련해 “내용을 공개하면 그는 도덕적으로 죽는다”고 했으나 구체적인 얘기는 하지 않았다.

이태훈 기자 jefflee@donga.com

●“후배들까지 끌고 들어가나” 법원 곤혹

수입 카펫 판매업자 김홍수(58·수감 중) 씨의 법조계 로비 사건이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이고 있다.

조관행(50·구속) 전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8일 비공개 구속영장실질심사 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과정에서 다른 판사들의 이번 사건 연루 가능성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다칠 사람’ 누가 있나=조 전 부장판사는 영장심사 때 “내가 유죄로 인정되면 OOO, OOO, OOO 판사도 유죄가 되는 것 아니냐”, “검찰 수사기록에 내가 다른 판사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돈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 판사들을 다 조사해 보면 될 것 아니냐”고 말했다.

조 전 부장판사가 언급한 판사는 지방법원 부장판사급 3명. 이 중에는 대법원 재판연구관도 1명 포함돼 있고 이들은 현재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조 전 부장판사가 다른 판사까지 거론하고 나선 데에는 “왜 나만 문제 삼느냐”는 불만이 깔려 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법원과 검찰 관계자들은 9일 조 전 부장판사의 발언에 대해 “억울하다는 점을 강조한 얘기”라며 ‘폭로’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라고 해석했다.

문제는 조 전 부장판사가 김 씨와 친분을 맺은 기간이 16년이나 되는 데다 김 씨가 아는 판사들은 대부분 조 전 부장판사의 소개로 만났다는 데 있다.

그렇게 소개한 판사가 몇 명이나 되는지, 김 씨와는 어떤 ‘거래’가 오갔는지를 조 전 부장판사가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조 전 부장판사의 소개로 김 씨를 알게 된 몇몇 판사는 이후 김 씨와 ‘직거래’를 한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 전 부장판사, 입 열까=법원은 조 전 부장판사가 영장심사 과정에서 다른 판사들을 거명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곤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법원 관계자는 “후배 법관들 이름까지 줄줄이 대면서 그런 얘기를 했다는 건 기가 막힐 노릇”이라고 말했다.

조 전 부장판사는 검찰의 추가 조사 과정에서 계속 다른 판사들에 대한 조사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기소가 되면 재판 과정에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김 씨를 만날 때 동석했던 후배 판사들을 증인으로 신청할 가능성도 있다. 이 경우 후배 법관들이 줄줄이 법정의 증언대에 서는 상황은 불가피하다.

비록 형사처벌 대상은 되지 않더라도 김 씨와 함께 어울리는 자리에 동석했다는 사실만으로 이들 판사는 치명상을 입을 수밖에 없다. 법원 역시 어느 조직에나 있을 수 있는 1, 2명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 판사가 두루 연루돼 있다는 게 사실로 드러나면 최악의 상황에 빠져들 수 있다.

▽추가 수사 대상은 누구=검찰은 9일 “수사 대상은 당초 밝힌 10여 명 외에는 현재로선 더 없다”고 밝혔다. 구속된 조 전 부장판사, 김영광 전 검사, 민오기 총경 외에 남은 7, 8명에 대한 수사에 주력한다는 것.

이 중 대법원 재판연구관 K 씨는 기소될 가능성이 높다. K 씨는 담당판사에게 부탁해 “법정 구속된 지인이 보석으로 석방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김 씨에게서 1000만 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부장검사 출신인 P 변호사는 5년여 동안 전별금과 용돈 등의 명목으로 김 씨에게서 3000만 원을 받았으며 경찰 간부에게서도 수백만∼수천만 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이들을 이달 말경 불구속 기소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김 씨에게서 수백만 원을 받은 또 다른 현직 판검사들은 징계를 통보하는 선에서 매듭지을 것으로 보인다.

조용우 기자 woogija@donga.com

정원수 기자 needjung@donga.com

▼“검사, 비리 연루 참담”정상명 검찰총장▼

정상명 검찰총장이 김영광 전 서울중앙지검 검사가 법조비리 사건에 연루된 것과 관련해 참담한 심경을 토로하며 검찰 간부들에게 철저한 수사와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9일 대검찰청에 따르면 정 총장은 조관행 전 서울고법 부장판사와 함께 김 전 검사에 대해 구속영장이 청구된 7일 대검 확대간부회의에서 “공명정대하고 깨끗한 검찰을 열망하는 국민과 묵묵히 직무에 충실한 검찰 가족들에게 한없이 부끄럽고 참담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다”고 말했다.

한편 대검 감찰부는 검사가 비리 혐의로 기소되거나 중징계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면 수사 단계에서부터 검찰총장의 신청으로 법무부 장관이 해당 검사에 대해 직무집행정지를 명령할 수 있도록 검사징계법 조항을 개정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이태훈 기자 jeff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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