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동일 예비역 대령 “9년간 매일 절골지통 겪었습니다”

  • 입력 2005년 11월 9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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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환 기자
홍진환 기자
‘절골지통(折骨之痛).’

7일 오후 서울 양천구 목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예비역 해군 대령 백동일(白東一·57·사진) 씨는 그간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하루하루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

고통의 원천은 죄책감이었다. 자신 때문에 9년의 시간을 송두리째 빼앗긴 사람을 생각하면 먹고 자는 일상 자체가 괴로움이었다.

“9년 1개월 13일 만에 로버트 김(김채곤·金采坤·65) 선생님을 다시 만나고 나니 세상의 공기가 바뀐 듯합니다.”

미국 입국이 금지된 백 씨는 6일 인천국제공항에서 김 씨를 만나고 나서야 질곡에서 어느 정도 해방됐다. 하지만 지난 9년을 회상할 때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백 씨는 한때 해군의 최고 정보장교였다. 국방부는 해외 공관의 무관을 상대로 6개월마다 평가를 하는데 백 씨는 1995년에 두 차례나 최우수 무관에 선발됐다.

임기 3년의 무관직을 마치면 ‘별(장군)자리’가 보장됐기에 그는 앞만 보고 달려갔다.

그렇게 순탄했을 때 두 사람은 처음 만났다. 1995년 11월 28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해군정보교류회의에서 백 씨는 무관 자격으로, 미 해군정보국(ONI) 소속 정보분석가였던 김 씨는 미군 측 통역사로 자리를 함께했다.

백 씨는 김 씨에게 원만하게 행사를 진행해 준 데 대해 고마움을 표시하다가 한국의 정보력 부족을 토로했다고 한다.

그런데 뜻밖에도 김 씨는 “그렇게 어려운지 몰랐다. 가능한 범위 내에서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두 사람은 처음에는 기밀이 아닌 범위에서 정보를 주고받기로 했다.

어느 날 기밀문서가 백 씨에게 배달됐다. 이들은 모든 정보를 우편으로 주고받았다. 문서에는 기밀 표시가 없었지만 내용을 보면 누구든 기밀임을 짐작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10개월 동안 백 씨는 김 씨에게서 기밀문서 수십 건을 건네받았다. 물론 백 씨는 떳떳했다. 그는 “이름 석자를 걸고 정보를 받은 대가로 김 선생님에게 단돈 1센트도 주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오히려 식사나 골프를 함께하자고 권할 때마다 김 씨는 “선약이 있다”거나 “좋은 날이 오면 만나자”며 한사코 거절했다고 한다.

백 씨는 “김 선생님은 오로지 자신이 건넨 정보가 조국 안보에 작은 보탬이 되길 바랐을 뿐”이라고 말했다.

대가는 혹독했다. 김 씨는 1996년 9월 국가기밀취득음모죄란 무시무시한 혐의로 체포돼 9년간 옥살이를 하고 보호관찰을 견뎌야 했다.

백 씨 또한 본국으로 소환된 뒤 자신의 주특기인 정보 분야가 아닌 미군과 접촉이 없는 특수임무 부대에서 근무하다 2001년 1월 군복을 벗었다.

전역한 날 저녁 그는 7년간 끊었던 담배를 다시 입에 댔다. 김 씨가 석방된 지난해 7월 이후 담배를 다시 끊었다는 백 씨는 계속된 스트레스로 고혈압과 관절 이상 등 육체적 질환까지 얻었다.

그러면서도 백 씨와 김 씨는 서로를 위로했다. 백 씨는 김 씨가 1998년경 옥중에서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을 잊지 못하고 있다.

“나와 백 대령은 하늘이 맺어준 형제입니다.”

그는 실제 자신과 김 씨가 많이 닮았다고 했다. 두 사람은 모두 장남이지만 부모를 모시지 못한 데다 부모의 임종을 보지 못했다. 백 씨의 아버지는 그가 무관으로 있던 1996년 5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7일 백 씨는 김 씨를 따라 김 씨 부모의 유골이 안치된 전북 익산시 왕궁면 동봉리 원불교 공원묘지인 영모묘원을 찾았다.

백 씨에겐 이제 특별한 소원이 없지만 다시 김 씨를 걱정했다.

“카메라 플래시를 아무리 터뜨려도 마음 한구석에 생긴 구멍은 메울 수 없습니다. 9년이란 시간이 비어 버렸는데 무슨 수로 그 시간을 메울 수 있겠습니까.”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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