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들이 떠난다]“남아서 욕먹느니 속편한 길로”

  • 입력 2005년 9월 22일 03시 03분


최근 벌어지고 있는 검사들의 ‘사표 러시’는 이전의 양상이나 다른 조직에서 볼 수 있는 것과는 다르다. 사표를 내는 검사 수가 가파르게 늘고 있고 이들 중 상당수가 한창 일할 중견 검사들이다.

검사들이 시대의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지만 범죄로부터 사회를 지키는 검찰의 역량이 ‘인재 탈출’로 크게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가 많다.

▽“안에서는 스트레스, 밖에서는 견제”=사표 러시의 가장 큰 원인으로는 현 정부 들어 계속된 검찰에 대한 강도 높은 견제와 ‘힘 빼기’로 검사들의 사기가 크게 위축됐다는 점이 꼽힌다. 노무현(盧武鉉) 정부 들어 사표를 낸 검사 수는 그 이전과 확연히 구별된다. 2000∼2002년 3년간 퇴직한 검사는 139명인 데 비해 새 정부가 들어선 2003년 이후 퇴직한 검사는 197명. 42%나 늘어났다.

지방의 한 간부 검사는 ‘직업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꼽았다. 그는 “좋게 말해 범죄를 단죄한다고 하지만 그 결과는 개인을 파괴하고 한 가정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검사는 “검찰이 50여 년 동안 권력기관 비슷하게 되어 있어 적폐가 많이 쌓였기 때문에 국민의 비판을 받고 있는 것도 한 원인”이라고 말했다.

반면 대기업과 로펌의 ‘구애’는 훨씬 거세졌다. 선배들이 누려온 ‘제도 이상의 권력’이 거의 사라진 상황에서 고액의 보수가 보장되는 대기업이나 로펌의 유혹은 훨씬 매력적으로 다가온다는 것.

▽‘참살이(웰빙)’ 바람도 한몫=사표 러시의 이면에는 ‘참살이’ 바람이 분다.

서울중앙지검은 올 8월 정기 인사를 앞두고 평검사들로부터 희망보직 신청을 받았는데 금융조사부 지원자가 가장 많았다. 금조부는 ‘기록과 숫자’를 중심으로 수사를 진행하는 데다 말썽의 소지도 적어 인기를 끄는 것 같다고 한 검사는 전했다.

업무 강도와 위험도가 높은 강력부와 형사부가 기피 부서가 된 것은 오래된 일이다. 특수부는 과거 검사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으나 이젠 ‘3D 부서’로 변하고 있다.

서울중앙지검의 한 검사는 “검사들도 규칙적으로 출퇴근하며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를 원하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박수도 좀 쳐야…”=한 특수부 검사는 “시대 흐름이 검찰을 비난만 하는 분위기”라며 “검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 ‘박수칠 때 떠나라’를 봤는데 ‘욕먹지 않을 때 사표 내고 떠나라’는 말을 하는 것처럼 들리더라”고 말했다.

검찰은 자부심과 명예를 먹고 사는 조직인데 순기능은 제쳐 두고 견제와 비난만 한다면 누가 남아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태훈 기자 jefflee@donga.com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경대수(慶大秀) 제주지검장이 ‘검찰가족’9월호에 띄운 글▼

떠나는 검사들을 바라보며

최근 촉망받던 선후배 동료검사들이 특별한 사유도 없이 불현듯 검찰을 떠나가는 모습을 거듭 바라보면서 우선 그분들의 새 출발이 큰 발전으로 결실 보기를 기원하면서도 한편으로 서운하고 착잡한 마음이 듭니다.

떠나간 그분들이나 남아있는 분들이나 모두 소명의식을 갖고 검사란 직업을 택했을 텐데 과연 무엇이 그분들로 하여금 미련 없이(?) 검찰을 떠나게 만든 것일까 궁금합니다.

검찰은 큰 변화의 기로에 있습니다. 안으로는 과거의 권위주의적 관행에서 벗어나라는 질책을 받고 있고, 밖으로는 수사권 조정과 사법 개혁이란 과제를 앞에 놓고 머리를 싸매고 있습니다.

이 같은 변화의 기로에서 검찰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떠나는 그분들의 결심에 큰 계기가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면 안타깝습니다.

본디 개혁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이므로 개혁 대상이 된 처지에서 보면 고통이 없을 수 없겠지만, 그 고통을 감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개혁 과정에서 구성원들의 사기와 조직에 대한 사랑마저 뿌리 뽑아버리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축사(畜舍)의 가축은 모두 도살 처분해도 새 가축으로 채운다면 축사로서의 기능이 유지되겠지만 인간 세상에서 구성원이 모두 떠난 조직은 원래 조직의 본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외국도 ‘검찰 위기’…日서도 검사 사직 사회문제로▼

가이우스 비셴(30) 씨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 시 검찰청의 3년차 검사다. 살인과 마약 범죄 등을 주로 담당한다.

2003년 5월 로스쿨을 졸업하고 바로 검찰에 들어갔는데 당시 그는 “미국에는 나쁜 ×들이 너무 많아서 처단해야 한다”고 입문 동기를 말했다. 그는 검사로서 처음 1년 동안 정신없이 일했다. 야근도 밥 먹듯이 했고 휴일도 없었다.

그런데 올해 4월에 다시 만난 그는 전혀 딴 사람이 되어 있었다.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5시에 ‘칼 퇴근’을 한다. 검사로서의 열정도 식은 듯했다.

이유를 물어보니 “달라지는 게 없다(No difference)”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범죄자는 잘 빠져나가고 사회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난해에는 동료 검사가 보복을 노린 조직폭력배의 총에 맞아 숨진 사건도 발생했다고 한다.

미국의 많은 검사들이 이처럼 무기력하다고 말한다.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우수한 인재들이 검찰을 기피하기 때문. 로스쿨 졸업생 중 우수한 인재는 거의 예외 없이 법원 재판연구관(Law clerk)이나 대형 로펌(법률회사)을 택한다.

하와이대의 데이비드 존슨(법사회학) 교수는 최근 “1996년의 O J 심슨 전처 살해 혐의 사건과 올해 6월 무죄평결이 내려진 마이클 잭슨의 아동 성추행 혐의 사건은 무능한 검사들이 유능한 변호사들에게 참패한 대표적 사건”이라고 말했다.

일본에서도 1980, 90년대 검사의 사직이 큰 사회문제가 되었다. 1989년 일본 도쿄지방변호사회는 그해 퇴직한 144명의 검사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응답자 중 절반 이상이 “사명감이 약해졌다”고 대답했다.

일본 검찰 간부들은 현재 일본 검찰의 가장 심각한 문제를 ‘유능한 인재 확보’로 꼽고 있다.

이수형 기자 so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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