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권오혁]학교를 戰場으로 만들어서야

  • 입력 2005년 5월 4일 18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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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입학 후 첫 중간고사를 치르는 1학년생들이 ‘7일 오후 7시 광화문에 모여 촛불시위를 벌이자’는 인터넷 사발통문을 돌리고, 이에 대비해 서울시교육청은 학생들이 촛불집회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지도하라는 공문을 서울시내 전 고교에 보내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고교 교육이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됐을까. 교육현장의 각박함은 주변에서 들려오는 단편적인 사례들을 통해 피부로 절감할 수 있다.

특수목적고에 다니다가 내신성적이 나빠 학교를 그만둔 친구의 조카는 일반 학교로의 전학을 포기하고 검정고시 준비를 시작했다고 한다. 자신의 전학으로 내신성적에서 손해를 볼 아이들의 따돌림이 두려웠던 것이다.

며칠 전에는 밤늦게 학교에서 돌아온 딸아이가 잔뜩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타 학교에서 전교 수석을 하던 아이가 전학 왔다는 것이었다. “공부 잘하는 친구가 전학 오면 학교도 좋아지고 너도 좋은 친구 생겼는데 뭐가 문제냐”고 물어봤다. 딸아이는 “그 친구 때문에 내신성적에 피해를 보게 생겼다”며 하교하던 친구들이 모두 불만을 토로했다고 했다.

딸아이는 그나마 아직 내신 비중이 낮은 고교 2학년생이다. 지금 고교 1학년생들부터 적용될 새로운 대입제도에서는 그 비중이 훨씬 높아진다. 그 결과 아이들은 고교생활 3년 내내 12번 대학입시를 치르는 입시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고교 1학년 자녀를 둔 주변 사람들을 만나 보면 시험 때문에 가정생활이 실종됐다고 하소연들이다. 내신시험 준비를 위한 학원에 보내느라 과외비가 몇 배 더 드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래도 그 입시 부담에 짓눌려 있는 아이들의 고생에 비하자면 부모들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간 수차의 교육개혁을 추진해 온 교육인적자원부가 학교를 정상화한다고 하더니 전쟁터로 만든 것이다.

386세대인 우리도 대학입시에 목매는 시절을 살았지만 고1 때부터 이렇듯 긴장되고 각박한 학창생활을 하진 않았다. 고3 때는 ‘4당5락’이니 뭐니 해서 긴장할 수밖에 없었지만 고2까지는 나름의 여유와 낭만도 있었다. 친구들끼리 의기가 투합해 이런저런 객기도 부리고 나중에는 대학입시를 함께 준비하는 ‘전우애’도 있었다.

외국의 경우도 우리 같은 분위기는 찾기 어렵다. 한국에서도 한때 베스트셀러였던 ‘오체불만족’이라는 일본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고교생이 된 오토다케가 3년 내내 각종 동아리활동에 참여하며 유쾌한 청소년기를 보내는 부분이다. ‘이런 성장기를 지낸 녀석이라면 정말 건전하고 균형 있는 사회인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미국과는 전혀 다른 우리 교육 현실을 무시한 채 학교 교육을 정상화한다고 도입해 그 비중을 높여 가고 있는 내신성적이 고교생들의 숨통을 억누르고 있다. 그것도 함께 공부하는 학급 친구들이 직접적인 경쟁자가 되는 잔인한 교실에서 말이다. 지금 고1들이 고3이 되면 내신성적이 좋지 않은 학생 중 상당수가 자퇴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 내신성적은 다시 어찌해 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나라 입시제도를 쥐락펴락하면서 수시로 바꾸는 교육 당국이다. 하겠다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 교육 현장을 도외시한 채 현란한 수사를 늘어놓는 온갖 위원회와 교육 전문가들의 허황한 개선안들, 그리고 학교 내 권력 장악에 골몰하는 일부 교원단체의 이기심 속에서 우리의 아이들이, 우리의 미래가 시들고 있다.

권오혁 부경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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