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판중심주의’ 첫 적용해보니…

  • 입력 2005년 4월 5일 04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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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오후 서울 강동시영아파트 재건축 비리 관련 재판이 열린 서울중앙지법 311호 법정.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부장판사 최완주·崔完柱)가 수사기록에 의존하기보다는 사건 관련자들의 진술을 직접 듣고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는 ‘공판중심주의’가 실질적으로 적용된 첫 재판이어서 법정 분위기가 예전과 달랐다. 재판에서 검찰 측과 변호인은 외국 영화에서나 볼 수 있던 열띤 공방을 벌였다.

▽뜨거워진 법정 공방=이날 채택된 첫 번째 증인은 재건축조합장 김모 씨에게 금품을 건넨 혐의로 구속기소된 상모 씨가 운영하는 S 철거업체의 부사장 박모 씨.

검찰이 먼저 신문에 나섰다.

“상○○ 씨가 조합장에게 얼마를 주기로 했다고 들었나?”(검사)

“10여 차례에 걸쳐 1억 몇 천만 원을 건넸고 총 3억 원을 ‘해야겠다’고 말했다.”(증인)

증인의 답변이 끝나자 재판장이 신문에 끼어들었다.

“‘해야겠다’는 말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이냐? ‘주기로 했다’는 것이냐, ‘약속이 돼 있다’는 것이냐?”(재판장)

“주기로 했다는 것이다.”(증인)

최근 공판중심주의가 강화되면서 검찰이나 변호인 측의 증인 신문 도중에 재판부가 증인에게 직접 질문을 던져 증언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려고 하는 일이 잦다. 검찰의 수사기록에 의존하며 형식적인 질문 몇 개만 던지던 과거와는 크게 달라진 모습이다.

이어진 변호인 측의 반격도 매서웠다.

“상○○ 씨가 조합장에게 돈을 건넸다는 것은 상○○ 씨에게서만 들었지 다른 사람에게서는 들은 적이 없지 않느냐? 또 증인은 조합장이 돈 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취지로 얘기한 적이 있지 않나?”(변호인)

이에 검찰은 반박을 위한 재신문에 나섰다. 증인은 양측의 ‘핑퐁 신문’에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앞뒤 증언이 일치하지 않을 때에는 재판장이 사실관계를 다시 따졌다.

▽과제도 적지 않아=이날 재판을 통해 공판중심주의가 정착하기까지는 해결해야 할 과제도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변호를 맡은 법무법인 서광 김영갑(金永甲) 대표변호사는 “검찰이 수사기록을 제출하지 않으면 효율적인 변론을 할 수 없어 피고인의 항변권이 제한된다”며 “검찰의 ‘수사기록 열람 등사신청 거부’에 맞서 이번 주 내에 헌법소원을 낼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검찰은 “공판중심주의 체제에서 수사기록을 모두 제출하면 피고인 측이 이것을 읽고 증인을 회유하거나 협박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어 공소 유지에 지장이 된다”는 입장이다.

김 변호사는 또 “피고인 측이 전혀 모르는 증인이 채택되면 변호인은 제대로 된 신문을 할 수 없어 나중에 반박논리를 갖춰 증인을 다시 불러야 하는 등 재판이 지연된다”고 말했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법원은 이날부터 매주 월 수 금요일에 1, 2명씩 모두 20명의 증인을 불러 ‘집중심리’를 진행할 계획이지만 변호인 측의 주장대로라면 판결이 나기까지 꽤 시일이 걸릴 수 있다.

▼강동시영 재건축비리는

철거업자 상모 씨가 서울 강동 시영아파트 재건축 철거를 맡게 해 달라며 조합장인 김모 씨에게 금품을 건네고 회사돈 29억여 원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사건이다. 조합장 김 씨는 상 씨에게서 1억4400여만 원을 받은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또 상 씨가 검찰조사에서 “김충환(金忠環) 한나라당 의원이 강동구청장으로 재직하던 2003∼2004년에 공사수주 등 청탁 명목으로 김 의원에게 1억1000여만 원을 줬다”고 진술해 검찰이 김 의원을 소환해 조사를 벌였고 김 의원은 상 씨를 무고 혐의로 고소하기도 했다.

▼공판중심주의란

검찰 수사기록에 의존하는 종전 재판에서는 법관이 사건에 대한 선입견을 가질 수 있고 이는 ‘피고인의 무죄 추정’이라는 헌법 원칙에도 어긋난다고 보고 재판부가 법정에서 피고인 등 관련자의 생생한 진술을 토대로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려는 제도다.

공판중심주의에 대한 법원-검찰-변호인의 입장
법원검찰변호인
-‘무죄 추정’이라는 형법의 대원칙을 충실히 지키기 위해 법관이 검찰의 수사자료와 조서에 의존하기보다는 법정에서 피고인의 진술을 직접 듣고 사실 판단을 해야 한다.-피고인이 검찰에서 조사받을 때 자백했던 내용을 법정에서 부인하면 ‘조서’를 증거로 쓸 수 없다.-공판중심주의의 기본 원칙에는 이의가 없지만 검찰이 모든 수사기록을 제출할 경우 피고인의 방어에 활용될 수 있어 증거로 사용할 수사기록은 재판정에서 제시하겠다.-공판중심주의의 이면에는 법원이 검찰을 장악하려는 시도가 있을 수 있다.-공판중심주의에는 찬성하나 검찰이 수사기록을 제출하지 않으면 효율적인 변론을 할 수 없어 피고인의 항변권이 제한된다.-변호인 측이 반박을 위해 검찰이 채택한 증인을 다시 불러야 해 재판이 지연되며 ‘신속한 재판을 받을 피고인의 권리’가 침해된다.

배극인 기자 bae215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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