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기부]“사회에 남긴 것은 영원합니다”

  • 입력 2005년 3월 27일 18시 24분


“아버지가 남기신 50억 원을 6형제가 6등분으로 나눠 줄어들게 하는 것보다 사회에 환원해 남들과 함께 나누니 훨씬 더 행복하네요.”

㈜태평양 창업자인 고 서성환(徐成煥) 회장의 가족들은 평소 ‘나눔’을 강조했던 고인의 뜻을 기려 태평양 주식 7만4000주와 해당 주식에 대한 2002년도 이익배당금 등 50억 원 규모의 유산을 2003년 비영리단체 ‘아름다운재단’에 기증했다.

재단에서는 이 돈으로 고인이 생전에 관심을 기울였던 저소득층 모자(母子)가정의 창업과 취업, 생계비 등을 지원하고 있다.

고인의 둘째 딸 서혜숙(56) 씨는 “아버지 유산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기로 결정하면서 형제들 사이에 우애가 더 깊어졌다”며 “기부한 돈이 이러이러한 곳에서 잘 쓰이고 있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매우 뿌듯하다”고 말했다.

㈜유한양행 일가는 2대에 걸쳐 ‘노블레스 오블리주(높은 신분에 따른 도덕적 의무)’를 실천한 것으로 유명하다.

창업자 고 유일한(柳一韓) 회장은 1971년 세상을 뜨면서 전 재산인 유한양행 주식 36만주(현재 시가 2400억 원)를 사회사업과 교육사업에 써 달라고 유언장을 썼다. 아들에게는 “대학까지 공부시켰으니 앞으로 자립해서 살라”는 말을 남겼다.

고인의 딸인 고 유재라(柳載羅) 여사도 1991년 세상을 뜨면서 200억 원이 넘는 재산을 아버지의 유산으로 세운 공익기관 유한재단에 기부했다.

억대의 유산은 아니지만 성실히 모은 돈을 선뜻 사회에 내미는 손길도 줄을 잇고 있다.

평생 행상을 하며 홀로 힘들게 살아 온 김춘희(80·서울 양천구 신정3동) 할머니는 자신이 숨지면 통장에 있는 예금 1000만 원과 현재 살고 있는 옥탑방 전세금 1500만 원 등 전 재산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부하기로 올해 1월 약정했다.

김 할머니는 “사회가 있었기 때문에 내가 밥을 먹고 살 수 있었다”며 “죽기 전에 받은 만큼 돌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미용실을 운영하는 강성자(48·여·서울 금천구 시흥5동) 씨는 한국여성재단에서 진행하고 있는 ‘유산 1% 기부운동’의 1호 약정자.

강 씨는 “나같이 평범한 사람도 사회를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유산 기부의 가장 큰 장점은 남은 인생을 열심히 살게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소액을 매달 보험금으로 납입했다가 죽은 뒤 일정액의 보험금을 비영리단체에 기부하는 이들도 있다.

경북 경주시에서 태권도 도장을 운영하던 김모(2003년 사망·당시 37세) 씨는 2003년 5월 “내가 죽으면 불쌍한 아이들을 도울 수 있게 유니세프한국위원회에 보험금을 지급해 달라”며 ING생명 무배당 종신보험에 가입했다.

보험에 가입한 지 4개월 만에 김 씨는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김 씨의 보험금 1000만 원은 고인의 뜻대로 유니세프한국위원회에 기증됐다.

그의 부인 김모(34) 씨는 “남편이 세상을 뜨고 나서야 이런 보험에 가입했는지 알았다”며 “남편의 뜻에 동참하는 의미로 같은 보험에 가입했다”고 말했다.

대구대 전영평(全永評·도시행정학) 교수는 유산의 10%를 자신이 공동대표로 참여하고 있는 시민단체 대구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에 기증하기로 2000년 약정했다.

전 교수는 “외국에 유학 가 있는 동안 외국 사람들이 자신들이 참여했던 시민단체 등에 유산을 기부하는 모습을 종종 봤다”며 “큰 액수는 아니지만 나의 작은 실천이 사회 발전을 위해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증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는 “나누는 것이 곧 행복이라는 것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우리 사회의 희망”이라고 덧붙였다.

▼재앙 부르는 상속싸움▼

설날인 지난달 9일 오전 경기 파주시에서 형이 동생 가족 3명을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참변이 일어났다.

형제들 중 동생이 상속받은 땅만 신도시 개발 덕분에 값이 올랐고 동생이 이를 처분해 큰돈을 만지게 됐다. 이에 장남 이모(66) 씨는 “아버지의 유산분배 취지에 맞게 땅 판 돈을 다시 나누자”고 요구했고 말다툼 끝에 동생 가족들에게 엽총을 난사한 것.

우리 사회에서 ‘부모 재산은 내 재산’이라는 관념이 뿌리 깊다. 그러나 부모 재산이 자녀의 행복으로 이어지기보다는 불행의 씨앗이 되는 경우도 많다.

최근 자식이 아버지를 살해하고, 부인이 남편의 청부 살해를 의뢰하는 가족 범죄의 배경에는 상속 문제가 깔려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끔찍한 사건까지 들먹이지 않는다고 해도 형제 간 반목은 상당수 유산 문제와 결부된다. 장남은 장남의 특권을, 남자는 아들의 혜택을, 자매들은 평등한 분배를 요구하며 갈등을 빚다 결국엔 법정까지 가곤 한다.

법원의 ‘상속재산의 분할에 관한 처분 소송’ 신규 접수 건수는 1999년 134건, 2000년 370건, 2001년 398건, 2002년 311건에서 2003년 1054건으로 매년 늘고 있다.

법무법인 한울의 장시일(張時溢) 변호사는 “소송까지 왔다고 하면 가족 간 우애는 거의 기대하기 힘들다”며 “법원이 재산 분배는 해줄 수 있지만 그동안 주고받은 상처까지 만져주지는 못 한다”고 말했다.

상속은 자식들을 의존적이고 이기적으로 만든다는 지적도 있다.

연세대 사회복지학과 김진수(金振洙) 교수는 “상속에 대한 기대는 2세의 독립의식과 절약정신을 해친다”고 말했다. 바로 눈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사회 전체의 창의성과 독립성을 서서히 좀먹는다는 것이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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