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미디어포커스 동아일보 복간과정 왜곡

  • 입력 2003년 12월 23일 19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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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강제 폐간한 지 5년 4개월 만인 1945년 12월 1일 발행된 동아일보 복간호 1면. ‘천도(天道)-무심(無心)치 않어 이 강토에 해방의 서기를 베푸시고…’로 시작되는 중간사엔 광복의 환희가 넘친다. 중간사는 그와 함께 ‘이 붓이 꺾일지언정 좌고우면(左顧右眄)이 있을 수 없다’며 정론지로서의 엄숙한 다짐을 3000만 동포에게 전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일제가 강제 폐간한 지 5년 4개월 만인 1945년 12월 1일 발행된 동아일보 복간호 1면. ‘천도(天道)-무심(無心)치 않어 이 강토에 해방의 서기를 베푸시고…’로 시작되는 중간사엔 광복의 환희가 넘친다. 중간사는 그와 함께 ‘이 붓이 꺾일지언정 좌고우면(左顧右眄)이 있을 수 없다’며 정론지로서의 엄숙한 다짐을 3000만 동포에게 전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KBS는 8·15 광복 직후 동아일보의 복간과 관련해서도 중대한 왜곡 보도를 했다. 13일 KBS 1TV의 ‘미디어 포커스’는 김민환(金珉煥) 고려대 언론학부 교수의 말을 인용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총독부 기관지였던 경성일보의 인쇄 시설을 이용하고자 했으나 그 회사 노조원들이 친일언론 복간엔 협조할 수 없다고 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총독부 기관지에 근무해왔던 사람들이 1940년 일제가 강제로 폐간시킨 동아일보에 대해 친일을 이유로 인쇄 협조를 거부했다는 것은 도대체 아귀가 맞지 않는다. 그런데도 KBS가 이렇게 무책임한 보도를 한 전후 사정을 헤아려보면 단순히 동아일보에 대한 음해 이상의 중대한 문제에 부닥치게 된다. 바로 대한민국의 건국이념 및 정통성에 관한 것이다.

▽경성일보는 광복 후에도 일본어로 발간했다=1940년 8월 10일 일제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강제폐간하면서 우리말 신문으로는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하나만 남겨뒀다. 같은 총독부 기관지이지만 일본어 신문이었던 경성일보는 한글 활자가 없어 광복 후에도 계속 일본어로 찍어냈다. 더욱이 경성일보는 광복 직후 한국인 직원들을 내쫓고 1945년 10월말까지도 일본인들이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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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세력은 광복 후 언론부터 장악했다=일찍부터 정치선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던 좌익세력은 광복 후 제일 먼저 신문 발행에 손을 뻗쳤다. 건국준비위원회는 광복 바로 다음날인 8월 16일 매일신보 접수에 나서기도 했다. 당시 서울에서 신문을 찍을 수 있는 인쇄시설을 갖춘 곳은 몇 개 되지 않았는데 광복과 동시에 거의 좌익의 수중에 들어갔다. 경성일보 인쇄노조도 좌파가 장악했다.

▽‘조선인민보’도 경성일보 출신들이 만들었다=광복 후 최초로 창간된 신문 역시 좌익성향의 조선인민보였는데 경성일보 출신들이 지배했다. 좌익 언론인들이 주도한 10월 23일 전조선기자대회에서 선언문을 낭독한 조선인민보의 김정도 사장도 경성일보 출신. 그러나 그는 이듬해 월북해 평양에서 발행된 ‘민주조선’의 편집국장에 취임했다. 총독부 기관지 출신들이 좌파의 선봉에 선 것 자체가 해방 공간의 이념적 혼란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런 좌익세력이 동아일보 복간을 방해했다=동아일보 사사(社史)는 그 무렵에 대해 “일제가 동아일보를 폐간하면서 인쇄 시설도 강제로 매도케 해 자체 시설이 없었다. 서울 시내에서 신문을 인쇄할 만한 시설들은 좌익계열에서 접수해 동아일보의 인쇄를 맡으려 하지 않았다. 미 군정이 경성일보 관리인으로 지명한 이상철에게 교섭했으나 그도 동사(同社)를 장악하고 있는 좌익분자들의 압력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아는 폐간 5년4개월 만에 다시 빛을 봤다=1945년 12월 1일에야 동아일보는 복간호를 낼 수 있었다. 중간사(重刊辭)는 창간사의 3대 주지를 재천명하고 이를 구체화해 다시 △민족의 완성, 민족문화의 완성 △민주주의에 의한 여론정치 △사회 정의의 구현 △국제민주주의의 확립 등 4대 주지를 행동 규범으로 제시했다. 이는 좌익 언론의 독무대였던 그 시절 민족진영에 천금의 힘이 됐다. 이승만은 축사를, 김구는 축하 휘호를 보내왔다. 조선일보는 1주일 앞서 11월 23일 복간했다.

▽‘친일’ 매도는 좌익의 상투적 수법이었다=각 분야에서 좌우 대립이 심각했던 당시 좌익이 우익을 공격할 때마다 입버릇처럼 외친 선전 구호가 ‘친일세력 청산’이었다. 아직 나라의 기틀조차 잡히지 않은 상황에서 좌익은 일제에 항거했던 민족주의자들까지 싸잡아 친일세력 청산에 미온적이라며 공격했다. 조선인민보는 ‘일제 잔존 세력과 반동언론의 도량’이란 사설 등을 통해 이승만과 김구를 비난하기도 했다.

▽인쇄 협조 거부 이유는 ‘친일’이 아니었다=경성일보 노조가 친일을 이유로 동아일보 인쇄 협조를 거부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김 교수도 전화인터뷰에서 “(그러한 내용을 담은) 특별한 성명서가 있다기보다는 당시 좌익이 우익을 향해 흔히 쓰던 말을 인용한 것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인쇄 시설을 찾고 있던 동아일보 대주주들의 매일신보 인수설이 나돌았을 때 역시 좌파가 주도했던 매일신보의 자치위원회가 내건 반대 이유도 ‘특정 정당의 기관지나 개인 소유물이 될 수 없다’는 정도였다.

▽결국 KBS 보도는 짜깁기에 의한 허위다=그렇다면 KBS 보도는 동아일보를 의도적으로 헐뜯기 위해 별개의 사실이나 상황을 그럴 듯하게 엮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교묘하게 기획된 왜곡 보도의 이면에 감추어진 동기와 의도다.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은 자유민주주의였으며 그 정통세력은 우익이었고 좌익은 대항세력이었다. 그런데도 58년 전의 시대 상황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나 고려도 없이 편협한 논리로 광복 공간의 공과(功過)를 멋대로 재단하려는 기도엔 간과할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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