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송금' 첫 공판, 8人의 피고 ‘어색한 한자리’

  • 입력 2003년 7월 4일 18시 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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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억달러를 정부가 공개적으로 마련하기 어려워 현대에 대신 내줄 것을 요청하지 않았습니까.”

“요청한 적이 없습니다.”

4일 오후 ‘대북 송금 의혹 사건’ 첫 공판이 열린 서울지법 309호 법정.

김종훈(金宗勳) 특검보의 서릿발 같은 추궁이 이어졌지만 박지원(朴智元·구속) 전 문화관광부 장관의 대답 또한 단호했다.

이날 8명의 피고인 중 가장 나중에 피고인석에서 증언한 박 전 장관은 앞서 증언한 다른 피고인들과는 달리 공소사실을 대부분 부인하거나 진술을 거부했다.

“정부가 1억달러, 현대가 3억5000만달러를 지원키로 협상한 사실이 맞느냐”는 김 특검보의 질문에는 “외교와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답변할 수 없다. 법정에서 진술할 수 없다”며 사실상 진술을 거부하기도 했다.

“정부가 지원키로 한 1억달러는 정책적인 대북지원금 성격이냐”는 질문에도 “같은 이유로 대답할 수 없다”고 결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앞서 이날 법정에는 재판 1시간 전인 오후 2시경부터 현대그룹, 국가정보원, 통일연대, 민가협 회원 등 150여명의 방청객들이 몰려와 법정 안에는 빈자리를 찾기 힘들었다.

오후 3시 정각, 박 전 장관을 비롯해 이기호(李起浩) 전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 이근영(李瑾榮) 전 산업은행 총재 등 구속 피고인들이 입장하자 법정은 순간적으로 긴장감이 감돌았다.

특히 박 전 장관은 넥타이를 맬 수 없는 구속 상태임을 고려한 듯 깃 없는 차이나풍 와이셔츠에 검은색 양복, 검은색 뿔테 안경 등 깔끔한 모습으로 법정에 들어섰다.

그러나 박 전 장관의 강력한 부인에도 불구하고 앞서 증언한 정몽헌(鄭夢憲) 현대아산이사회 회장 등 대부분의 피고인들은 특검의 수사결과를 그대로 인정하는 모습이었다.

정 회장은 “박 전 장관이 1억달러를 현대에서 대신 지급할 수 있느냐고 요청해 이를 승낙한 뒤 현대에서 모두 4억5000만달러를 보냈다”며 박 전 장관과 상반된 진술을 했다.

정 회장에 이어 증언한 이 전 수석 역시 “정부의 대북 송금 몫의 1억달러를 현대가 마련하는 대신 현대에 금융지원을 약속하지 않았느냐”는 박광빈(朴光彬) 특검보의 질문에 “(2000년) 5월 중순경 그런 결정을 한 것 같다”며 공소사실을 인정하는 모습이었다.

오후 7시경 4시간 가까이 진행된 재판이 끝나자 박 전 장관 등 구속 상태인 3명의 피고인들은 대기실로 향하며 불구속 피고인 및 변호인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눴다.

임동원(林東源) 전 국가정보원장은 이 전 산은 총재의 손을 붙들고 “힘들지만 조금만 참으시라”고 격려하기도 했다.

박 전 장관과 상반된 진술을 한 정 회장은 다시 구치소로 가야 할 박 전 장관의 등을 툭툭 치며 몇 차례 인사를 시도했으나 박 전 장관이 계속 외면하자 난처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몇 차례 시도 끝에야 박 전 장관은 정 회장 쪽으로 돌아본 후 ‘어색한’ 악수를 나누고 총총히 구속 피고인 대기실로 들어갔다.

길진균기자 leon@donga.com

장강명기자 tesomi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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