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먹은 방재시설]<상>실태와 대책

  • 입력 2002년 9월 10일 18시 32분



《해마다 연례행사처럼 되풀이되는 자연재해. 태풍 루사로 인해 200명이 훨씬 넘는 사망 실종자와 8만8000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하고 사상 최대인 5조4600여억원의 재산피해가 났지만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태풍과 폭우 등 자연재해에 대해 이처럼 무기력하고 매년 똑같은 피해를 보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자연재해 발생 자체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상습적으로 엄청난 피해가 나는 것은 ‘천재(天災)’보다는 ‘인재(人災)’의 성격이 강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즉 하천 제방 교량 도로 등의 건설 및 관리에 방재 개념이 제대로 접목되지 않고 있는 데서 빚어지는 재해라는 것이다. 각종 방재시설의 실태와 보완해야 할 점, 선진국의 사례 등을 2회에 걸쳐 시리즈로 살펴본다.

▽알고도 화를 당하는 하천 관리〓하천 범람, 제방 유실 등으로 인한 침수 피해를 보면 안전진단이나 주민신고 등을 통해 이미 문제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제때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낙동강을 포함해 총연장 4200㎞에 달하는 경북지역 하천들의 제방은 대부분 1970년대 강모래를 사용해 만드는 등 부실 시공으로 인해 이미 수십년 전부터 곳곳에서 누수현상이 나타났다.

총연장 7800㎞에 이르는 전북도의 하천 제방도 80% 가량이 모래로 만들어진 상태이며 지금도 신축을 하거나 개보수를 할 때 하천 내 모래와 자갈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제방을 만들 때는 누수 방지를 위해 깨끗한 모래와 자갈 점토를 적당히 배합해야 하는 데 이렇게 하려면 공사비가 많이 들고, 또 단기간에 많은 제방을 만드느라 필요한 점토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또한 토사가 쌓여 강바닥이 주변보다 높은 곳은 제 때 준설을 해야 하지만 예산 마련이 쉽지 않은 데다 이에 반대하는 민원 제기로 인해 해마다 강물이 범람하는 침수 피해를 보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빨라도 당해 연도 말에나 이뤄지는 예산배정 방식을 바꾸고 도로 등에 비해 우선투자 순위에서 항상 밀리는 하천 관리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시급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건설교통부에 따르면 1992년부터 2001년까지 10년간 연평균 도로사업 투자비는 4조8000여억원에 이르나 치수사업비는 4100여억원으로 8.6% 수준에 불과한 실정이다.

충북도의 경우 2001년 도로 및 교량에 8600여억원이 투자된 반면 같은 해 하천관리에 들어간 돈은 300여억원에 불과하다. 경북도의 경우도 같은 해 도로 건설과 유지에 연평균 1조8000여억원이 투자됐지만 하천관리에는 2000억∼3000여억원만 투자됐을 뿐이다.

경남도청 관계자는 “지방자치제가 실시된 이후 가시적인 효과가 나타나는 도로 개설 등에 집중적으로 투자가 이뤄진 반면 치수사업은 뒷전으로 밀린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도로 1㎞를 개설하는 데는 120억∼130억원이 필요하지만 하천 1㎞를 개수하는 데는 10억여원이면 충분하다”며 “복구에만 급급해하지 말고 적은 비용으로 효과가 큰 ‘계획 개수(改修)’에 보다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도시화로 인해 대부분 설계 홍수량 이상의 물이 흘러들고 있는 소규모 하천의 경우 유량 진단을 보다 정확히 하는 동시에 유입량 감소 대책도 마련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국립방재연구소 심기오(沈基五) 연구관은 “일본은 대도시 주변에 대형 저류지를 만들어 폭우시 하천으로의 유입량을 조절함으로써 침수를 예방하고 있다”며 “되풀이되는 수해를 막기 위해서는 하천의 유량, 유속, 강우강도 등을 정밀 조사하고 제방과 하천바닥 등에 대한 관리가 제대로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인명피해의 뇌관, 주택가 절개지〓전국 수십만 곳에 산재돼 있는 주택가 절개지의 경우 우선 경보 및 방재시설을 만드는 게 시급하다. 또 관련법을 바꾸어 개인 사업자가 절개지 공사를 할 때 안전관리에 보다 신경을 쓰도록 하는 게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대형 공사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절개지 안전관리가 전무한 게 현실. 태풍 루사로 18명의 사상자가 난 경남 김해시 내삼농공단지의 경우 야산을 60도 각도로 무리하게 절개한 것이 붕괴의 한가지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또 강원지역은 수해가 나기 전 도내 지방도에 대한 낙석 실태조사 결과 108곳이 위험지구로 판정됐으나 실제 보수가 행해진 건 25곳에 불과했다. 전남 광양지역은 폭우 외에도 사면 절개시 유량 계산을 잘못해 물을 먹은 토사가 자체 무게를 이기지 못해 무너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행 자연재해대책법은 자연재해에 대한 방재조직과 계획, 예방 등에 대한 포괄적인 내용만 다루고 있을 뿐 경사면 붕괴에 대한 적극적인 예방 차원의 대책은 미흡한 실정이다.

국립방재연구소에서 산사태 위험 점검표를 운용하고 있으나 수해시 인명 피해가 자주 발생하는 주택가 소규모 경사면에 대해서는 거의 점검을 하지 않고 있다.

대만은 토사 이동이 감지될 경우 경보를 울리는 경보시스템을 운용하고 있다. 또 일본은 1958년 산사태방지법이 만들어진 이래 69년 급경사지의 붕괴로 인한 재해방지법, 2001년 토사재해방지대책추진법 등을 추가로 만들어 절개지 붕괴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소규모 주택 시공업체를 운영하는 최모씨(63)는 “경사지를 절개할 때는 토양과 암반의 경사도 등에 대한 조사를 해야 하는 게 원칙이지만 수익성 때문에 거의 안 하고 때론 배수구조차 설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한국건설재해예방의 정찬욱 이사는 “현행 건설기술관리법과 시설물안전관리에 관한 특별법은 옹벽, 축대 등 시설물에 대한 안전점검을 16층 이상의 건물에만 적용하고 있다”며 “15층 미만의 아파트 등 공동주택은 산사태 예방에 거의 무방비 상태”라고 말했다.

또 국립방재연구소 박덕근(朴德根) 연구관은 “재해 위험 경사면에 대한 점검과 평가표 작성을 의무화하고 이를 통해 전국적으로 위험지역 분포도를 작성할 필요가 있다”며 “위험지구에 대해서는 거주와 개발을 제한하는 등의 대책 마련도 시급하다”고 말했다.

이진구기자 sys1201@donga.com 길진균기자 leon@donga.com 전국종합

최근 5년간 자연재해로 인한 유형별 인명피해 현황
19961997199819992000
산사태 및 축대 붕괴251113112161
하천 및 계곡 급류289217329295
주택 붕괴--171-18
선박 침몰41141142191
감전 및 낙뢰--18--18
기타 6102011754
77383848949637

▼日 막대한 예산투입… 美 홍수지역 보험 의무화▼

일본과 미국 등 이른바 방재 선진국들은 수십년에 걸친 계획과 노력으로 지금과 같은 ‘완벽한’ 방재시스템을 만들어 냈다.

일본은 1959년 나고야(名古屋) 인근 이세(伊勢)만에 집중된 호우와 해일로 5100여명이 목숨을 잃는 대형 수해를 입었지만 6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치산치수(治山治水) 5개년 계획’ 등을 통해 최근에는 자연재해로 인한 연간 사망자를 30명 이내로 줄이고 있다.

40여년이 넘게 꾸준히 시행되고 있는 이 사업은 현재 12조엔(약 120조원)의 예산을 투입하는 8차 계획이 진행중이다.

일본의 자치단체들도 토지 사용 시 우수저류(雨水貯留) 시설 설치를 의무화하는 등 도시계획에 방재 개념을 포함시키고 있다.

실례로 일본 도쿄(東京), 오사카(大阪), 나고야 등 대도시 지하에는 80년대 초반부터 폭우 시 하천으로 집중되는 우수를 줄이기 위한 직경 10∼18m, 길이 10㎞ 안팎의 지하하천 수십개가 만들어졌으며 지금도 시설을 계속 늘려가고 있다.

미국은 1960년까지 30여년간 각종 치수사업 등 홍수대책에 70억달러(약 8조4000억원)를 투자했다. 그러나 시설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인식해 70년대부터는 ‘홍수터 관리’ 등의 치수사업을 추진해 인명과 재산피해를 줄이고 있다.

홍수터 관리는 100년 이내에 한번이라도 홍수가 날 수 있는 지역은 모두 홍수 위험지역으로 지정하고 이 지역에서는 개발 및 건축을 엄격히 제한하는 것이 골자. 또 개발 시에는 개발업자가 하수도 설비 등 완벽한 홍수 방어대책을 강구하도록 하고 있다.

미국은 또 70년대부터 홍수보험을 도입해 재해 발생 시 신속하고 현실적인 보상에 나서는 한편 홍수에 취약한 지역의 경우 의무적으로 홍수보험에 들도록 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재해로 인한 사유 시설물 복구비를 정부가 무상 지원하면서 생기는 ‘모랄 헤저드(도덕 불감증)’를 막을 수 있고 또 개발을 억제하는 효과를 거둘 수도 있다. 아울러 개발자의 과실로 재해가 발생했을 경우 이에 대한 책임을 엄격히 묻고 있다.

프랑스는 하천 범람의 우려가 있는 지역의 경우 물의 흐름을 저해할 수 있는 건물 등의 건설을 금지하는 등 토지 이용에 제한을 두고 있다.

전문가들은 우리의 경우도 홍수보험제도 등 민간 위기관리 시스템을 도입해 재해 방지에 민간인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연세대 토목공학과 조원철(趙元喆) 교수는 “선진국들의 방재시스템은 막대한 시간과 자본이 투입된 결과”라며 “이러한 시스템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합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길진균기자 l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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