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카드 약인가 독인가<중>]신용사회의 그늘

  • 입력 2002년 5월 17일 18시 35분


지방대학생 박모씨(20·여)는 2년 전 입학 직후 학교 정문 앞에서 전업카드사 A신용카드사로부터 카드를 발급받았다. 소득이 없는 만18세여서 ‘카드대금을 대신 내겠다’는 부모동의서가 필요했지만 모집인은 “(동의서는) 알아서 만들어줄 테니 신경쓰지 말라”고 했다. 박씨는 카드를 마음껏 썼고 현금서비스도 받았다. 1년만에 연체된 액수가 200만원대로 올라섰다. 카드회사에선 “연체된 돈은 대출로 돌려줄 테니 천천히 갚으라”고 제안했다.

박씨는 그 후 B사의 카드를 추가로 갖게 됐다. 이 회사 모집인은 한술 더 떠서 “직장인이라 하겠다”며 모 음식점 전화번호를 신청서에 적어 넣었다. 카드 본사에서 직장에 확인전화를 할 때 “가입자가 여기서 일한다”고 답변하기로 이야기가 돼 있는 음식점이었다.

▼글 싣는 순서▼

- <上>흔들리는 '신용사회'

빚에 몰린 박씨는 지난해 어머니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박씨 가족들이 항의하자 A카드사는 “카드대금의 절반만 내면 없었던 일로 하겠다”는 제안을 해왔고 타협이 이뤄졌다.

박씨는 현재 휴학을 한 뒤 아르바이트에 전념하고 있다. 박씨 어머니는 “사업이 어려워져 돈도 없지만, 아이의 카드빚을 대신 갚을 생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박씨는 “나 같은 이유로 휴학한 친구가 한 명 더 있다”고 말했다. 금융감독원은 박씨와 B카드사 사이의 강제조정을 검토하고 있다.

감당할 능력없이 돈을 쓴 박씨는 ‘신용사회의 적(敵)’일까. 수당 몇 만원에 불법이란 사실을 눈감아버린 모집인이 박씨를 신용불량자로 몬 것일까. 아니면 ‘만18세 미만자의 카드빚을 책임지겠다는 부모 동의가 사실인지’를 묻지 않은 카드사의 무책임을 탓해야 할까.

▽카드 신용불량자 100만명〓9000만장이나 발급돼 떠도는 신용카드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지고 있다. 2, 3년 전 ‘연체가 좀 늘더라도 많이 발급해야 수익성이 있다’는 카드사의 영업전략에 따라 퍼져나간 카드가 ‘카드 관련 신용불량자 100만명’ 시대를 열었다.

신용카드는 두 얼굴을 갖고 있다. 쉽게 지불할 수 있도록 했고 회계 처리가 불투명한 자영업자의 세원(稅源)을 드러냈으며 경기회복의 견인차가 된 소비 증가를 이끌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부분이다.

그러나 폭발적으로 늘어난 카드는 건강한 소비문화에 적응하지 못한 신용불량자를 양산하는가 하면 때로는 인생을 송두리째 망쳐 놓기도 했다.

올 3월 부산의 정모씨(57)가 2000만원대 신용카드 빚을 진 딸에게 미안하다며 자살한 사건도 잘못된 신용카드 사용이 부른 비극. 또 1000만원이 안 되는 카드빚을 갚기 위해 여성을 잇따라 납치 살해한 사건도 온 나라를 경악케 했다.

유흥업소 종사자들은 “멀쩡한 집안의 젊은 여성이 유흥업소에 취업하는 가장 큰 이유는 카드빚 때문”이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카드 관련 범죄도 급증〓젊은이들이 카드빚에 몰리는 가장 큰 이유는 무분별한 소비 탓이지만 또 하나의 주요한 경로는 불법 다단계 조직에 빠지는 것. 불법 다단계판매 조직에 빠진 대학생들은 물건값을 치르기 위해 보통 수천만원씩의 빚을 지게 되는데 이것도 카드가 마구 발급되기 때문에 가능한 일. 다단계 조직은 하위 회원들에게 카드를 통해 현금을 동원하라고 부추기고 때로는 한 사람당 10여장씩의 카드를 대신 신청해주기도 한다.

서울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4월중 72건에 그쳤던 카드 관련 범죄가 올 4월엔 1150건으로 늘어났다. 서울 경찰청 조영석 반장은 “수사력을 집중시킨 것도 적발 건수 폭증의 이유지만 ‘신용카드는 현금’이란 시각이 범죄 증가를 불렀다”고 말했다.

신용사회구현시민연대 대표 석승억씨(33)는 “주민등록 말소자가 53만명이라는 것은 채권자의 횡포가 얼마나 심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주장했다. 채무자가 카드사의 빚 독촉을 피해 주민등록 이전없이 이사를 하자, 카드사 추심인들이 채무자 압박 수단으로 동사무소에 ‘이곳에 살지 않는 사람’이라는 민원을 넣어 주민등록을 말소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김승련기자 srkim@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