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노갑측 청와대에 의혹눈길

  • 입력 2002년 5월 1일 18시 30분


97년 1월 한보사건이 터졌을 당시 연루설이 나돌았던 김영삼(金泳三) 전 정권의 핵심 측근들은 제각각 내용이 다른 ‘음모론’을 들고 나왔다. 김덕룡(金德龍) 의원은 YS의 차남 김현철(金賢哲)씨를 겨냥해 음모론을 제기했고, 홍인길(洪仁吉) 전 의원도 ‘나는 깃털에 불과하다’며 다른 ‘몸통’이 있음을 시사했다. 김현철씨 마저 검찰소환이 임박하자 김덕룡 의원 등을 겨냥, 역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5년이 지난 지금 김대중(金大中) 정부 하에서도 유사한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진승현(陳承鉉)씨로부터 5000만원을 전달받은 혐의로 검찰에 소환된 민주당 권노갑(權魯甲) 전 최고위원이 검찰출두 과정에서 이번 사건을 ‘허위 조작 날조’라고 주장한 것도 임기말 여권 핵심부의 핵분열 조짐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권씨 측근들 중에는 “우리더러 ‘장세동(張世東)’이가 되라는 것 같은데…”라며 흥분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들이 말하는 ‘장세동’은 희생양이라는 의미였다.

권씨 측은 우선 돈을 전달했다는 김은성(金銀星) 전 국가정보원 2차장이 금융감독원 상대의 로비를 위해 권씨에게 돈을 줬다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국정원 2차장이면 권력의 핵심인데 본인이 직접 로비를 하지 왜 뒷방살이하고 있는 권씨에게 부탁했겠느냐는 얘기였다.

이들은 또 진승현씨가 구속된 지 1년6개월이나 지났는데 뒤늦게 권씨를 소환하는 것도 석연치 않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이들은 막연히 청와대 쪽에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으나 거기엔 일종의 원망도 담겨 있다.

권씨가 구속될 경우 이들의 원망과 의혹이 여권 내 갈등을 증폭시킬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권씨 측근들 중에도 상당수는 음모론에 대해 회의적이다. 현재의 청와대는 검찰과의 핫라인이 없고, 검찰 또한 임기말 정권을 별로 의식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이들은 오히려 진승현씨와 김 전 차장이 허위자백을 통해 엉뚱한 쪽으로 수사의 화살을 돌리려 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권씨의 한 측근은 “권씨는 김 전 차장과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사이이다. 김 전 차장이 검찰의 압박을 받고 자신과 가까운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 권씨를 물고 들어갔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제3의 가능성을 점치는 사람들도 있다. 즉, 현 정권 내내 추문에 시달린 검찰이 실추된 명예회복을 위해 그동안 최대 실세로 군림해 온 권씨를 마음먹고 ‘찍었을’ 가능성이다. 이들은 권씨를 소환하는 시점이 여권의 대통령후보가 확정된 직후라는 점을 주목한다. 이들은 권씨 소환이 대통령의 아들들을 소환하기 위한 예비작업의 성격도 있는 듯하다고 분석했다.

청와대는 물론 정치권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음모론에 대해 “있을 수 없는 일이다”고 극력 부인하고 있다.

한 핵심관계자는 “김 전 차장이 권 전 최고위원 집을 찾아갔을 때 결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아니었던 것으로 안다. 김 전 차장이 무슨 얘기를 하자 권 전 최고위원이 ‘무슨 소리냐’며 야단을 치고 쫓아낸 것으로 안다”며 이번 사건을 두 사람 간의 개인적인 문제로 돌렸다.

그는 “음모론이란 아직도 청와대가 검찰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서 출발하나, 지금 청와대는 아무 힘이 없다”고 덧붙였다.

윤영찬기자 yyc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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