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1년 4월 26일 18시 42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25일 오후 4시 경기 안성시 고삼면사무소. 일본에 강제징용된 아버지 김천만(金千萬·징용 당시 41세)씨 소식을 59년 만에야 듣게 된 김성순(金聖順·69·여·경기 안성시 고삼면) 씨는 처음에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아버지 김씨의 이름이 쓰인 유골 상자의 사진을 보고 나서야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괴었다.
1942년 김천만씨가 탄광노동자로 강제징용됐을 당시 김성순씨의 나이는 불과 10세. 김씨는 “아버지가 징용된 뒤 어머니와 4남매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도 없었다”며 “얼굴만 어렴풋이 기억할 뿐 아버지에 대한 변변한 추억 하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숨길 수는 없었다.
강제징용 등을 부정하는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으로 국민적 분노가 들끓고 있는 가운데 일제 만행을 생생히 증언하는 강제징용 희생자들의 유골 5기가 이번에 고향과 가족을 확인해 조만간 고국으로 돌아오게 됐다. 이 유골은 일본 후쿠오카(福岡)현의 20여개 절에서 발견된 160여구의 강제징용 희생자들 유골 중 신원이 확인된 경우.
김천만씨 등은 1942년에서 45년 사이 후쿠오카현 치쿠호(筑豊) 일대 탄광에 강제징용된 뒤 일본인들의 가혹행위와 탄광사고 등으로 그 곳에서 3년을 채 못 넘기고 모두 숨졌다.
당초 신원이 확인된 유골은 모두 7기였으나 이기룡(李基龍·징용 당시 22세)씨 등 2명은 끝내 가족을 찾을 수 없었다.
김씨 등이 한국의 유족을 찾을 수 있었던 데는 그 자신도 징용자였던 재일동포 배래선(裵來善·81·후쿠오카현 이즈카시)씨의 노력이 결정적이었다.
배씨는 10여년 전부터 치쿠호 지역 탄광에서 일했던 한국인과 일본인 생존자들을 일일이 찾아 그들이 간직하고 있던 기록과 기억을 토대로 300여명의 징용희생자 이름과 주소지 등을 확인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160여구의 강제징용 희생자 유골을 찾아낸것.
유골이 담긴 상자 위에 붓으로 쓰인 희미한 이름이 유족찾기의 출발점이 됐다. 이중 7기의 유골은 다행히도 그 이름이 배씨가 확인한 300여명의 희생자에 포함돼 있었고 징용 당시 이들의 국내 주소가 남아 있어 이를 단서로 유족들을 찾아나선 것. 배씨는 22일 이들 유골의 국내유족을 찾아 방한했다.
배씨는 자신이 찾아낸 대부분의 유골 상자에는 단지 ‘朝鮮(조선)’ ‘半島(반도)’ 등의 문구만이 남아 있을 뿐이어서 유족을 찾을 길이 없다며 “유골조차 수습 안된 희생자들은 헤아릴 수도 없을 것”이라며 한숨지었다.
94년에 유출된 후쿠오카현의 자료에 따르면 44년 이 지역 탄광과 군수공장에 강제징용된 한국인은 모두 17만1000여명. 배씨는 이들 중 적어도 1만여명이 탄광사고와 일본인들의 가혹행위로 숨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배씨는 “강제로 끌려가 숨진 징용자들은 일본의 추악한 역사의 증거”라고 비판했다.
<현기득기자>rati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