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딸에게 공개고발당한 여성파출소장 진술서 전문]

  • 입력 2000년 8월 11일 17시 15분


20년 동안 곱게 키워온 친딸에게 공개고발까지 당하고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지만 공인으로서 도의적으로 물의를 야기한데 대하여 석고대죄를 하는 심정으로 지금까지 자숙하고 있었으며 물의 야기에 대한 수습을 위해 수 차례에 거쳐 남편을 만나기를 시도하였으나 고소한 남편은 나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집으로 찾아가면 대문도 열어주지 않고 교묘하게 연로하신 시부모님과 딸을 앞세워 허위로 경찰조서나 인터넷에 올려 저를 공격하였지만, 저는 일방적으로 당하면서도 행여 딸이 마음의 상처라도 입을까 두려워 대응을 하지 않고 전전긍긍하고 있었으나 평소 아껴 주신 분들의 "너도 하나의 인격체로서 그냥 당하지만 말고 최소한의 방어는 하여야 한다"는 간곡한 당부가 있었고 이제는 한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문제로까지 확대되고 있으므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제가 결혼하게된 동기와 불행했던 결혼생활 그리고 이번 사건의 전말을 밝히고자 합니다.

저와 남편은 제가 고3때 스승과 제자 사이로 만난 것입니다.처음에는 존경하고 좋아하는 선생님이었으나 학교에서 다른 여학생과의 좋지 않은 소문으로 인하여 2학기 중간에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게 되었는데 이삿짐을 옮겨 주다가 강제로 성관계를 맺게 되었고 제가 경찰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여수에서 근무를 하는 동안 매주 여수로 찾아와서 만나게 되었고 80년 3월 딸을 임신하게 되자 아들 하나를 둔 이혼남인줄 알면서도 혼인신고를 하고 살림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남편의 폭력은 언제부터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80년 가을쯤 남편이 같은 학교에 근무하던 여교사와 내연의 관계를 가지면서 시작되었다고 판단됩니다.

퇴근을 10분만 늦게 해도 어디서 어느 놈과 놀다 왔냐고 시비를 걸어 폭행하고 조금만 실수를 해도(예를 들어보면 밥상을 차리다가 반찬그릇을 소리나게 상에 논다는 이유) 폭행을 하는 등 집안에서의 폭행은 다반사이고 심지어는 저의 직장인 경찰서 앞에서 저의 동료들이 보는 가운데 89년 무안경찰서앞, 93년 광주남부경찰서앞, 99년 5월에는 광주동부경찰서 앞에서 폭력을 행사하였습니다.

99년 추석때는 영광 친정에서 친정식구들이 모두 있는 자리에서 저를 폭행하다 저의 부모와 형제들에게 혼난 뒤 다시는 폭행하지 않겠다고 서약을 하였으나 그 이후로도 수시로 폭행을 하였습니다. 남편은 자기기분이나쁠 때는 주위에 누가 있든 없든 의식하지 않고 폭행을 하고 이를 부끄러워 하기는 커녕 너무나도 자랑스럽게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남편의 여자는 80년 3월 저와 혼인신고를 할 당시부터 같은 학교에 근무하던 여교사와 86년 9월까지 내연의 관계에 있었으며(그녀의 남편이 교육청에 가정파괴범이라고 진정서를 제출 하여 파면처분을 하려고 조사하였으나 제가 장학사 및 여교사의 남편과 그 부모를 찾아가 용서를 빌어서 감봉 3월의 경징계를 받았고 다른 학교로 전출됨) , 87년에는 같은 교회에 다니는 아가씨와 불륜관계를 맺다 저에게 들킨 적이 있으며, 89년 무안현경고등학교에 재직 시에는 제자인 여고생과의 추문으로 당시 모 기자에게 들켜 500만원을 갈취 당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때 돈이 없었기 때문에 저의 명의로(남편의 명의로는 이미 대부를 받은 상태였음) 연금대부를 받아 5년간 상환한 사실이 있으며, 95년부터 97년까지 진도 조도실고 근무 시에는 한달씩 집에 다녀가지를 않아 확인해 보면 섬에서는 나와 집에는 오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다른 여자가 있었다고 판단됩니다.

그렇게 판단한 이유는 특별히 같이 어울릴만한 친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시댁의 가족사항으로는 시부모님, 시누이 1명, 시동생 2명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이혼한 경력을 가지고 있고 특히 시동생 2명은 저희가 대학등록금 및 용돈까지 주면서 졸업시켰으나 직장을 잡지 못하고 백수로 지내고 있어 가게를 차려주고 결혼까지 시켜 주었습니다만 경제적 자립심이 없었고 저희가 경제적 지원을 끊어 버리자 성실하게 노력은 하지않고 쉽게 돈을 벌기 위해 범죄행위를(98년도에 부녀자를 상대로 금품갈취를 하다 큰 동생이 먼저 구속되었고 일주일 뒤 막내 동생도 유사한 사건으로 구속됨) 저질렀습니다.

이들이 구속될 때마다 제가 나서서 해결을 해야 했으며, 합의금은 물론이고 변호사비용까지 모두 저희가 부담을 해야 했으며 이들이 집행유예로 석방이 되고 난 뒤인 2000년 2월에도 또 다시 금전을 요청하여 200만원을 송금해준 사실이 있습니다.

집안의 경제문제는 애초에는 제가 맡았으나 남편이 돈을 어디로 빼돌리는지 자꾸 의심을 하고 뒷조사를 하였기 때문에 남편에게 돌려주었다가 98년 시동생 2명의 합의금과 변호사 비용 등으로 당시 통장에 있던 돈 3천만원 가량을 전부 써버린 후 저에게 통장을 돌려주어 제가 다시 경제를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제 부모님에게 처음 인사를 하러 간 자리에서조차 부모님이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반대를 하니까(이때까지 부모님은 아들이 있는 이혼남인줄 몰랐음) 부모님에게 화를 내고 자리를 박차고 나갔으며 이런 이유 때문인지 남편은 살림을 차린 사실을 부모님에게 알리지도 못하게 하였고, 저는 이에 대한 죄책감으로 부모님께 말도 못하고 참고 살아야 했으며, 특히 저의 딸 때문에 참고 살았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었고 어쩔 때는 숨쉬는 것조차 힘들 정도였으므로 저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95년부터 이혼을 생각하기 시작하였고 96년 경위로 승진하면서부터 현재의 직업에 대해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생활하였으나 남편의 의처증 때문에 마음놓고 직장일도 할 수 없었으므로 이혼의사를 굳히고 딸이 대학생이 되기를 기다렸습니다.99년 딸이 대학생이 되면서부터 이혼의사를 남편에게 적극적으로 얘기했으나 남편은 안된다고만 얘기 할 뿐 꿈쩍도 하지 않더니 99년 5월 초순경 점심시간에 연락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저희 경찰서 앞에서 다수의 시민과 저의 직장동료들이 보는 가운데 폭력을 행사하였기 때문에 더욱 이혼을 하고자 처음으로 4일간 가출을 하였습니다.

저는 가출을 하면 이혼에 동의를 해줄 줄 알았으나 남편은 이혼은 절대 안된다고 하며 지금부터 너하고 싶은대로 하고 살아라고 하며 간섭하지 않겠다고 했고 저는 내 마음은 당신에게서 이미 떠났으므로 당신 옆에 있는 것은 나의 빈껍데기인데 그래도 좋다면 살기는 하겠다고 하여 계속 결혼생활을 유지하였으나 이후에도 계속 폭력을 행사하면서 저의 모든 행동을 간섭하며 구속하려 하였습니다.

저는 가정에서는 삶의 의미가 전혀 없었고 폭력으로부터 피난처이며 인생의 유일한 희망인 직장에서의 성공을 위한 돌파구인 경감승진시험에 합격을 해야 했기에 정말 열심히 공부했으며 최선을 다하였으나 2000년 1월 승진시험에 떨어지자 남편은 위로 한마디 없었으며 오히려 잘 떨어졌다고 비난하였습니다.

2000년 2월 9일 시험에 떨어진 여직원들끼리 모여 소주 한잔씩 하면서 다음에 더 열심히 하자고 얘기하다 귀가시간이 조금 늦었는데 술마시고 늦게 들어왔다는 이유로 얼굴 부위를 구타하여 2월 13일까지 출근을 못한 사실이 있습니다.

2000년 2월 14일 제가 윤락가를 관할하는 대인동 파출소장으로 발령을 받아 파출소장직을 잘 수행하려면 가사일에는 아무래도 소홀해질 수밖에 없을 것 같아 남편에게 사정하기 위해서 국제호텔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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