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 그 아름다운 삶]"공익활동 민간, 가진 자가 앞장을"

  • 입력 2000년 5월 24일 20시 03분


동아일보와 동아닷컴, 그리고 사회복지법인 ‘아이들과 미래’는 그동안 공동기획으로 기부문화 캠페인 ‘나눔, 그 아름다운 삶’을 진행해 왔다. 이제 그 마무리 차원에서 우리 기부문화의 현실을 다시 한번 정리하고 바람직한 미래상을 제시하기 위해 관계자들의 좌담을 마련했다.

참석자는 ‘아이들과 미래’ 이사장인 손봉호 교수(서울대), 사회복지학 전문가인 이혜경 교수(연세대), 대표적인 벤처기업의 하나인 ㈜옥션의 이금룡 사장 등이다.

―우리나라는 전반적으로 기부문화가 약하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먼저 그것부터 짚고 넘어가지요.

▽손봉호교수〓우리는 자식에 대한 애정이 너무 강해요. 재산을 무조건 자식에게 물려주려고 해요. 어렵게 살아서 그렇긴 하겠지만 돈을 벌어 남에게 기부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아요. 또 작은 규모의 동정은 잘 하는데 큰 돈 내는 데 익숙하지 않아요. 배고픈 사람에게 밥 주는 것은 잘 하는데 ‘희사’ 문화는 거의 없다는 얘기지요. 그건 단순히 동정심만 갖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이금룡사장〓저는 대기업에도 있어봤지만 그동안 우리 기업들은 우선 돈이 있으면 투자할 생각부터 했습니다. 투자하는 대로 돈 벌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일단 사업을 해서 돈을 벌면 이를 확장해 고용을 늘리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지요. 외국 같은 데서는 재벌총수가 유언으로 재산을 국가에 헌납했다는 소식도 들리지만 아직 우리나라에는 그런 분들이 많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선 ‘김밥 할머니’ 같은 분들이 거의 유일하지 않나요.

▽이혜경교수〓우리의 경우 지방분권과 자유주의 경험이 적다는 점도 한몫 합니다. 예로부터 ‘가난은 나라도 구제 못한다’는 말이 있는데 뒤집어보자면 ‘나라는 모든 것을 해야 한다’는 의미가 깔려있는 거지요. 남을 돕는 공익활동도 마찬가집니다. 이런 전통은 오늘까지 이어져 민간의 공익활동에 정부가 간섭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외국의 경우는 시민들 공익활동의 ‘나머지 부분’을 정부가 맡아 왔어요. 비영리법인 만드는 것도 쉽지요. 그러나 우리나 일본은 민간단체가 공익활동을 하겠다면 정부가 여러 가지 조건을 따져 ‘허락’해줍니다. 특혜로까지 여겨지는 경우도 있을 정도지요. 여하튼 우리의 경우 가계 기업 정부의 3자가 이처럼 성숙한 기부문화를 형성하기엔 어려운 여건이었습니다.

▽이사장〓재벌이라고 하면 정경유착을 떠올리는 문화도 한몫 합니다. 그동안 특혜 받고 번 돈이니까 수재의연금 모을 때 몇억원, 불우이웃돕기 할 때 얼마 하는 식으로 돈을 내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이러다 보니 해당기업의 구성원들도 우리 회장이 돈 벌어 얼마 내놓았으니 따로 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어떤 경우엔 자기 봉급 떼어서 기부하는데도 실제 공익활동 하고 있다는 생각을 못해요. 기업회장들도 기부를 준조세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숭고한 행위가 퇴색되고 있습니다. 또 하나 얘기하고 싶은 것은 우리의 경우 교회나 성당, 절 등 종교단체에 헌금의 형태로 기부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 역시 ‘간접적인 기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교수〓재미있는 지적입니다. 작년 말 제가 전국 성인남녀 1700명을 대상으로 기부 실태를 조사한 적이 있어요. 무려 85%에 달하는 응답자가 “지난 1년간 기부행위를 한 적이 있다”고 했어요. 예측과 다른 결과였죠. 그런데 기부했다는 사람의 65%가 종교단체에 기부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나머지 역시 종교기관에서 운영하는 단체에 기부했다고 하니 대부분의 기부자들이 종교와 연관된 곳에 한 셈이지요. 그런데 이 헌금을 기부로 보아야 하느냐는 문제에 대해선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손교수〓자신과 가족의 복을 빌기 위해서나 교회 성당 절 등의 건물을 짓는 데에 많이 쓰이는 게 현실이니까요.

―그런 현실에서 어떻게 바람직한 기부문화를 형성해갈 수 있을까요.

▽이사장〓인터넷이 아주 유효한 기부문화의 도구예요. 전화 ARS도 위력을 발휘하지 않았습니까. 실제로 이번에 사회복지법인 ‘아이들과 미래’와 함께 활동하면서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인터넷 화면에서 클릭만 하면 복지기관 또는 그런 단체의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의 얼굴과 이름 등이 화면에 직접 뜨니 현장감이 있더라고요. 인터넷기업은 또 회원들의 커뮤니티가 형성돼 있어 돈과 사람을 모으는 데 대단히 빠릅니다. 한 기업이 최소한 한 개의 복지시설이나 봉사단체와 연결되면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허황된 얘기가 아닙니다. 인터넷이나 벤처기업 사장들은 모두 어려운 시절을 거친 사람들이에요. 달동네에서 직원 몇 명 데리고 일했던 경험들이 많습니다. 그런 CEO들은 번 돈의 사회환원을 늘 생각합니다. 우리도 기부자들을 대우해주는 문화가 있어야 해요.

▽손교수〓우리나라 사람들은 대가에 대한 집착이 강해요. 언젠가 일본 회사의 우수사원 표창식을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옆에 서 있던 한국사람이 상을 탄 일본사람한테 상금이 얼마냐고 물으니까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어요. 상이 중요하지 상금이 뭐가 중요하냐는 거죠. 우리는 돈이나 권력 같은 제로섬 가치에 대해선 높이 평가하는데 명예 같은 것은 상대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저 사람은 남을 잘 돕는 멋진 사람이다’라는 평판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면 나눔의 문화도 뿌리내릴 텐데 말이지요.

▽이교수〓그런 문화를 공동체로 확산시키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우리의 경우 예로부터 두레나 향약 같은 상부상조의 전통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로 넘어오면서 완전히 말살됐지요. 일제가 마을촌락 공동조직을 제도권 안으로 편입시키면서 자조(自助)집단을 다 파괴한 겁니다. 해방 후에도 국가주도의 성장이 이뤄지면서 공동체 안에서 상부상조하는 전통이 복원될 수 없었습니다.

▽손교수〓벤처기업의 이미지도 새로 형성돼야 합니다. ‘한방에 대박 터뜨린다’는 이미지를 넘어 진정한 기업문화를 만들어가야지요.

▽이사장〓정말 좋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나눔의 철학’이야말로 벤처기업의 철학이에요. 스톡옵션도 그렇고 일하는 방식도 네트워크로 이뤄지기 때문에 나눔의 철학 없이는 안되지요. 다행스러운 것은 벤처기업 사장의 자식들이 대개 아직은 어리기 때문에 유산상속을 생각할 처지도 아닙니다(웃음). 그분들은 세상이 얼마나 빨리 변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20년 뒤에 내 사업을 자식들에게 물려줄 수 있을지, 설사 물려줘도 자식들이 이렇게 빨리 변하는 지식정보사업을 할 만한 능력이 있을지 여부를 가늠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쨌든 앞으로 나눔의 철학 없이는 기업활동도 어렵습니다. 옛날에는 매출액이 제일 중요했지만 지금은 회원수가 중요해요. 이 이야기는 곧 기업의 이미지와 신뢰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겁니다. 해당기업 사장의 도덕성이 기업의 성패와 관계된다는 것이지요.

―기부문화를 확산시키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는 어떤 것들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이교수〓민간에 기부할 때와 정부기관에 기부할 때 세율혜택의 균형을 맞춰주면 민간단체에 대한 기부가 활성화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세제혜택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모은 돈을 어떻게 쓰는가에 대한 감시입니다. 여기서 사회복지기관의 투명성이 대단히 중요하게 대두되지요. ‘내가 기부한 돈이 과연 제대로 쓰일까’ 하는 불신이 있는 한 기부는 이뤄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손교수〓정말 좋은 말씀입니다. 앞으로는 공익단체의 도덕성과 투명성에도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져야할 때인 것 같습니다.

<정리〓허문명기자>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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