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철 불법로비 내용―파장]TGV 막판뒤집기 '검은 거래'

  • 입력 2000년 5월 9일 23시 33분


검찰수사로 현재까지 확인된 사실은 알스톰사가 김영삼(金泳三)정부에 간접적으로 로비를 시도했고 일이 성사되자 88억원을 로비스트인 최만석씨(59)에게 건넸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검찰 수사의 핵심은 △최씨 등이 실제로 정관계에 돈을 전달하고 로비를 했는지 △최씨 등의 로비가 차량 선정과정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에 모아지고 있다.

정부가 몇차례의 유찰 끝에 94년 독일의 이체에(ICE)를 제치고 프랑스의 테제베(TGV)를 차종으로 최종 확정하고 알스톰사를 차량 공급업체로 선정한 데 대해서는 당시부터 ‘정관계 로비’의혹이 제기됐었다.

또 한가지 이번 검찰수사로 알스톰사는 테제베의 확실한 선정을 위해 정식 에이전트로 프랑스의 한국교포인 강귀희씨와는 별도로 정관계에 발이 넓은 최만석씨를 은밀히 고용해 2원적 로비를 벌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 과정을 감사한 감사원 감사위원회는 94년 1월18일 의결한 ‘경부고속철도 건설사업 추진실태 감사결과 처분요구서’를 통해 “테제베와의 협상내용은 가격조건과 기술이전 문제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감사원 조사결과 5차 입찰 때까지 독일의 이체에가 평점에서 앞선 경우가 많았으나 테제베가 막판 뒤집기를 벌여 우선협상대상으로 선정된 사실이 밝혀졌다.

조사결과에 따르면 이체에는 1, 3, 5차 입찰에서 테제베를 앞서 총점에서 60여점 앞섰으나 93년 8월 최종입찰 때 테제베에 총점에서 300여점 차로 밀려 우선협상에서 제외됐다는 것. 최종 결과는 평점 100점 만점에서 테제베가 87점을 받고 이체에는 86점을 받아 테제베의 1점차 승리였다.

이같은 결과에 대해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은 ‘고속철도 차종선정 진상보고서’를 통해 “차종 선정과정에서 교통부 관계자와 청와대 고위층의 정보유출 및 커미션 수수의혹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차종 선정에 강력한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이같은 로비의혹이 구체적 단서를 통해 검찰 수사선상에 오른 것은 6년여가 지난 이번이 처음이다. 박상길(朴相吉)대검수사기획관은 9일 “수사팀이 상당한 의욕을 가지고 있다”며 철저한 수사의지를 내비쳤다.

그러나 검찰의 이같은 의지가 수사의 성과로 나타날지는 아직 미지수. 사건의 핵심적인 열쇠가 될 로비스트인 최씨가 잠적중인데다 94년 11월 홍콩의 최씨 계좌로 흘러든 돈의 흐름을 추적하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구속중인 공범 호기춘씨(51)는 최씨에게 모든 것을 미루고 있는 상태. 검찰 관계자는 “호씨가 국내에 들여온 일부 자금을 추적했으나 수사의 단서를 찾지 못했다”며 “최씨가 잡히지 않으면 단순 사건으로 끝날 수도 있다”고 말했다.최씨의 홍콩은행 계좌로 흘러든 알스톰사의 커미션은 대부분 국내로 반입되지 않고 통장에 남아있거나 일부는 최씨가 영주권을 가지고 있는 미국으로 흘러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검찰출신의 한 변호사는 “실제로 로비와 금품제공 약속이 있었다고 해도 외국은행으로 들어온 돈을 국내로 들여오는 바보같은 일을 했겠느냐”며 “음성적인 돈은 다시 외국으로 흘러가 그곳에서 차명으로 해결되는 것이 관례여서 추적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최씨가 검거되어야 고속철 차량선정 로비의혹의 실체가 어느 정도 파악되겠지만 경우에 따라선 그가 잡히더라도 입을 열지 않으면 미궁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신석호기자>kyle@donga.com

▼얽히고 설킨 커넥션

프랑스인인 알스톰사 한국지사장의 한국인 부인. 정계 실세와 가까운 재미교포인 한국인 로비스트. 둘을 연결시켜준 점술가.

고속철도 차량선정 로비의혹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은 ‘린다 김’사건 못지 않게 벌써부터 세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알스톰사의 정관계 로비의혹이 한국 수사기관의 수사망에 포착된 것은 95년말 ‘인터폴’을 통해서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94년 11월부터 미국계 은행의 홍콩지점에 프랑스로부터 거액의 자금이 들어오고 그해 12월부터 돈이 다른 계좌로 이동하는 것을 수상하게 여긴 홍콩 경찰이 이 사실을 한국 경찰청에 통보함으로써 사건의 단서가 처음 포착됐다.

그러나 검찰의 본격적인 내사가 시작된 것은 옷 로비 의혹사건에 대한 특별검사의 수사가 한창 진행중이던 99년 10월경. 당시 대검 중수부는 경찰이 보내온 자료를 토대로 호기춘씨(51)를 극비리에 소환, 주범이 최만석씨(59)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호씨를 설득해 최씨의 로비 사실을 추궁하는 한편 홍콩 은행 계좌에 대한 본격적인 추적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검찰이 계좌추적에 신경을 쏟는 동안 한국에 체류중이던 최씨가 낌새를 알아채고 잠적하는 바람에 수사는 미궁에 빠졌다. “최씨가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사건이 알려지면 검찰에 부담이 된다”는 이유로 사건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검찰은 신병이 확보된 호씨의 공소시효 만료시한이 5월 중순으로 다가와 사건이 영영 묻혀질 위기에 처하자 어쩔 수 없이 4월28일 호씨를 전격 소환, 다음날 구속했고 10일로 예정된 호씨의 기소를 앞두고 그동안의 수사결과를 발표하게 됐다.

검찰측의 이같은 설명과는 달리 이들의 불법 로비사실이 드러난 것은 이들이 로비 성공보수금 분배를 둘러싸고 내분을 일으켰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검찰에 따르면 호씨는 국내 H대학 영어과를 중퇴하고 국내은행과 외국계 회사 등에 근무하다가 90년경부터 알스톰 한국지사장이던 현재의 남편을 만났다.

호씨 구속영장에 따르면 지사장은 자신의 일을 돕고 있던 호씨에게 “새정부에 로비할 능력이 있는 사람을 물색해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

호씨는 한 점술가를 통해 최씨를 소개받았다고 검찰은 밝혔다. 이 점술가에게는 당시 내로라하는 유력 정치인과 관료들이 드나들었고 호씨와 최씨도 고객중 한사람이었다고 한다. 당시 최씨는 주변에 “새정부 인사들과 친하다”고 과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최씨가 알스톰사와 일종의 ‘계약’을 맺고 사건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호씨는 최씨가 본사로부터 ‘사례금’을 받은 뒤 지사장과 정식 결혼했다.

알스톰사측은 검찰에 “차량 공급과 관련해 본사가 받게 되는 수주대금이 10억3000여만달러였고 최씨와 정식 에이전트 계약을 맺고 국제 관례에 따라 1%가량을 대가로 지불한 것”이라고 소명했다.

<신석호기자>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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