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 백두산에 올랐다…맹인안내견 도움받아

  • 입력 2000년 4월 28일 19시 34분


“조금만 힘내, 토담아. 우린 할 수 있어.”

25일 오전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 해발 2400m 지점. 이날 대구대에 재학 중인 김기철(27·영어교육 4년) 김대운(27·사회복지학 3년) 노영관씨(23·경제금융보험 2년) 등 시각장애인 3명이 맹인안내견의 도움을 받아 백두산 등정에 나섰다.

이들은 제11회 세계맹인안내견의 날(26일)을 맞아 92년부터 맹인안내견 사업을 벌여온 삼성화재 부설 맹인안내견학교의 후원으로 시각장애인과 맹인안내견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 등정에 나선 것.

이날 오전 6시 반 창공 토담 재미 등 맹인안내견의 도움을 받아 해발 1600m 지점을 출발한 이들 앞에는 허벅지까지 잠기는 눈밭이 기다리고 있었다. 체감온도는 영하 20도. 세찬 칼바람까지 뼛속을 파고들었다.

특히 오전 9시반경 해발 2100여m 지점의 흑풍구(黑風口)에 이르자 건장한 남자도 중심을 잃을 만큼 거센 눈보라가 몰아쳤다. 사방은 눈앞을 분간하기조차 힘들었다. 이들은 이후 수십차례나 미끄러지고 눈 속에 파묻히면서도 2시간 가량 등정을 계속했다.

그러나 출발 5시간 반 만인 낮12시경 조선족 등산안내인들은 “도저히 안되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장애인들은 결국 눈물을 머금고 2400여m 지점에서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장애인들은 혹한 속에서 치른 ‘세계맹인안내견의 날’ 행사에서 국내 처음으로 발급된 ‘보조견 표지’를 안내견의 목에 걸어주며 아쉬움을 달랬다. 보조견 표지는 올해초 개정된 장애인복지법에 따라 보건복지부장관이 발급하는 것으로 이 표지를 단 안내견은 공공시설과 편의시설에 시각장애인과 함께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삼성맹인안내견학교 이동훈 운영과장(32)은 “정상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시각장애인이 맹인안내견의 도움만으로 험준한 겨울산을 오른 것은 세계적으로 드문 일”이라며 “이번 행사를 계기로 맹인안내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높아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맹인안내견은 현재 전세계에 21만마리 가량 있지만 국내에서는 30여마리뿐이다.

김기철씨는 “아쉽지만 악천후 속에서 창공이와 호흡을 맞춰 여기까지 오른 것만으로도 뿌듯하다”며 “이번 등정이 22만명의 국내 시각장애인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백두산〓선대인기자> eodl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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