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문화부 임병수국장, 동아일보 배달소년서 언론산업 책임자

  • 입력 2000년 3월 31일 20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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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부 임병수(林炳秀·50)문화산업국장은 동아일보 창간기념일인 4월1일 무렵이면 퇴근길에 서울 마포를 지나면서 묘한 감회에 젖는다.

‘정론전달’의 최일선인 동아일보 배달소년 출신으로 오늘날 정부의 언론과 미디어 산업이 발전하도록 뒷받침하는 실무총책임자에 오른 임국장.

1966년말. 충북 영동에서 서울로 유학온 중학교 2학년 임병수군은 동아일보 마포지국에서 배달을 시작해 68년 균명고(환일고의 전신) 2학년 때까지 일했다.

“그땐 몰랐죠. 우연히 신문과 맺은 인연이 30년 넘게 계속될 줄은.”

동아일보를 배달하면서 느낀 펜의 힘과 따뜻한 감성이 대학(성균관대) 진학 때 신문방송학과를 선택하게 했다. 76년 행정고시(18회)에 합격한 뒤 주로 언론과 문화 관련 분야에서 일했다. 그는 당시 석간 동아일보 150여부를 끼고 서울 아현동과 염창동 일대의 비탈길을 하루 7∼8㎞ 뛰어다녔다.

“묘한 자부심이 있었어요. 동아일보 배달은 그냥 ‘종이’를 나르는 일이 아니라는. 내가 나른 것은 사회의 어두운 곳을 비추는 사랑과 세상을 바꾸는 힘이 담긴 정보였습니다. 또 서슬퍼런 권력마저 궁지로 몰았던,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는 대쪽같은 목소리였죠.”

당시 한달 월급이 2000원. 자장면값이 100원이었는데 아껴 쓰면 학비와 자취비를 충당할 수 있었단다. 그는 “고 3과 고 2인 두 자녀에게 다른 건 몰라도, 내가 ‘독자들이 문 밖에서 기다리는 신문’ 동아일보와의 만남에서 얻은 꺾이지 않는 기백과 두 다리의 건강함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꼭 전해주고 싶다”고 말한다.

독재권력에 정면으로 맞섰던 민족정론지와 독자가 만나는 현장에서 소년기를 보내 ‘언론의 의미’을 체험한 탓인지 그의 언론관은 남다르다. 정부 ‘고위관리’인 그는 언론을 ‘통제의 대상’이 아니라 ‘격려의 대상’으로 본다. 그리고 미디어의 형식보다는 내용이 절대 우선한다고 믿고 있다.

“인터넷과 위성 등 기술적 측면이 아무리 발전해도 그것을 채우는 ‘문화’라는 소프트웨어가 충족되지 않으면 속빈 강정입니다. 언론도 포장보다는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느냐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김갑식기자>g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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