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교 '空교육'…학생 15% "교과서 아직 못받았어요"

  • 입력 2000년 3월 12일 19시 49분


교육 당국과 일선 학교의 주먹구구식 행정으로 초등학교 교과서가 모자라 새학기가 시작됐는데도 교과서 없이 공부하는 희한한 사태가 빚어지고 있다.

이 바람에 전국적으로 교과서 ‘품귀 현상’이 빚어지면서 책을 받지 못한 학생과 학부모들이 책을 구하기 위해 서점으로 몰리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학습서 매장. 초등학교 교과서를 구입하려는 학부모와 어린이들이 몰려들어 판매대와 계산대가 북새통을 이뤘다.

7000여권의 교과서가 반입된 것이 불과 사흘 전이었지만 주요 과목 교과서는 이미 동이 나고 없었다.

“학교에서 이곳으로 가면 책을 구입할 수 있다고 해서 왔는데 책이 없다니 무슨 말이냐”는 항의에 직원들은 “책이 모두 팔렸으니 다른 서점에 가보라”고 설득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교보측에 따르면 개학을 전후해 하루 평균 3000여권의 초등학교 교과서가 팔리고 있으며 교과서 판매를 대행하는 시내 주요 대형 서점도 실정은 비슷하다. 특히 국어 수학 등 주요과목 교과서는 한차례에 500여부씩 들여와도 하루 만에 동이 난다는 것.

초등학교 국정교과서를 제작 공급하는 대한교과서주식회사측은 “올해 들어 교과서 추가 수요가 폭증해 개학 이후에만 45만권을 추가로 인쇄했으며 그 중 30만권을 일선 서점에 공급하고 있지만 주문량의 절반도 못 채우고 있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국정교과서가 이처럼 품귀 현상을 빚는 가장 큰 이유는 일선 교육청과 학교에서 교과서 수요 예측을 잘못해 결과적으로 공급되지 못한 교과서를 학생들이 서점을 통해 구입토록 하고 있기 때문.

일선 학교 교사들은 IMF경제난으로 도입된 ‘교과서 물려쓰기 운동’이 교과서 품귀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입을 모은다.

일선 학교에선 교육 당국으로부터 헌 교과서를 재활용하라는 지시에 따라 교과서의 일정비율 재활용을 전제로 새 교과서를 주문하는데 막상 헌 책이 당초 예상만큼 들어오지 않고 걷힌 책도 찢어지거나 낙서가 심해 나눠줄 수 없는 것이 많아 부족 상태가 발생하게 된다는 것. 특히 새학기에 전학온 학생들의 경우는 남는 물량이 없어 거의 모두가 책을 받지 못하고 있다.

교보문고에 책을 사러 나온 학부모 김모씨(38·서울 서초구 방배동)는 “두 아이가 학교에서 교과서를 절반도 받지 못해 서둘러 책을 사러 나왔지만 며칠째 필요한 책을 구할 수 없어 아이들을 교과서 없이 학교에 보내고 있다”며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말했다.

본보 취재팀이 교육 당국과 일선 학교 교과서 담당 교사 등을 통해 확인한 결과 서울 시내 초등학교의 경우 재학생의 10∼15%가 교과서의 일부 또는 전부를 받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교사들은 “탁상 행정으로 전개되고 있는 ‘교과서 물려쓰기 운동’ 때문에 교과서 부족 현상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으며 헌책을 받는 학생들은 공부에 흥미를 잃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며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서울 강남의 한 초등학교 교사 최모씨(40)는 “‘교과서 물려쓰기’에 대해 학생과 학부모들의 불만이 많으며 교사들 사이에서도 이 운동이 교육 당국의 대표적인 졸속 행정으로 지적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등 교과서물려쓰기를 하는 선진국에서는 물려쓰기용 교과서를 따로 지정해 고급 용지에 하드커버를 사용하고 학생들도 책에 필기를 할 수 없도록 하는 대신 필기용 학습서는 따로 지급하고 있다.

서울시 교육청의 한 관계자는 “일선 학교에서 수급 예측을 잘못해 일부 부족분이 생기자 추가 주문을 하지 않고 학생들에게 구입을 떠넘기는 것 같다”며 “교과서 재활용을 획일적으로 시행할 때 생길 부작용에 대비해 재활용 비율 등을 학교장에게 일임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윤철기자>yc9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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