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자체장-지방의원 줄줄이 사퇴 "뽑아준지 얼마 됐다고"

  • 입력 2000년 2월 14일 19시 30분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들이 국회의원 출마를 위해 임기 도중 대거 사직했다.

이들의 총선출마에 대해 “국민의 참정권 행사로 이해해야 한다”는 긍정론도 없지 않지만 대부분의 주민과 학자들은 “선출된 지 1년반밖에 안된 공직자들이 다른 자리를 넘보는 것은 그들을 뽑아준 주민을 배신하는 것이며 행정공백으로 인한 주민의 실질적 피해도 만만찮다”고 비판하고 있다.

또 이같은 폐해를 제도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현재 2년마다 엇갈려 실시하고 있는 국회의원 선거와 자치단체장 선거를 동시에 실시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단체장 출마 현황〓본보 취재팀이 조사한 결과 김성순(金聖順)서울송파구청장 신종관(辛宗官)부산수영구청장 송석찬(宋錫贊)대전유성구청장 이세영(李世英)인천중구청장 등 4명의 구청장이 총선출마를 위해 지난주 사퇴했다.

또 광역의원 23명, 기초의원 5명도 사직했다.

실제로 사퇴한 자치단체장은 4명이지만 지난주까지 공천을 신청했거나 출마 의사를 내비친 단체장은 전국적으로 30여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막판까지 공천 또는 당선 가능성을 저울질하다가 공천이 안되자 결국 출마를 포기했다.

서울의 경우 정흥진(鄭興鎭)종로구청장은 “12일자로 사퇴하겠다”며 7일 구의회에 사직서를 보냈다가 11일 부랴부랴 사직철회서를 보냈다. 김동일(金東一)중구청장 고재득(高在得)성동구청장 박원철(朴元喆)구로구청장 등도 공천을 신청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사직의사를 거둬들였다.

95년 첫 자치단체장 선거가 실시된 뒤 현직 단체장들이 대거 총선 대열에 끼어든 것은 이번이 처음. 게다가 자치단체장은 세 번까지만 연임할 수 있기 때문에 다음 17대 총선때는 출마하려는 현직 단체장이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찬반 논란〓자치단체장의 임기중 선거 출마 논란은 97년 조순(趙淳)서울시장과 이인제(李仁濟)경기지사가 대선 출마를 위해 사퇴하면서 비롯됐다. 이에 따라 국회는 98년 여야 만장일치로 지방자치단체장의 임기중 대선 또는 총선 출마를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이에 대해 서울시내 23개 구청장이 헌법소원을 제출했고 결국 헌법재판소가 지난해 5월 “단체장의 피선거권 제한은 단체장은 물론 유능한 후보를 뽑을 수 있는 국민의 참정권을 제한하는 것”이라며 위헌 결정을 내렸다. 현직 단체장의 임기중 선거 출마 제한이 없어진 것.

그러나 단체장의 총선 출마로 인한 행정공백은 물론 출마를 염두에 둔 선심 행정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여전하다.

한 구청 관계자는 “구청장의 마음이 딴 곳에 가있는데 기초단체 단위의 장기 사업구상이 가능하겠느냐”며 “프로젝트 관련 공무원들은 사실상 일손을 놓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시민 김모씨(35)는 “뽑아만 주면 천직으로 알고 열과 성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던 게 불과 1년반전”이라며 “몸은 구청장실에 있어도 마음은 진작부터 여의도에 가 있었던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이기옥(李己玉)한양대교수는 “자치단체장의 정치권 진출은 한번 검증된 정치지도자의 육성이라는 점에서 원론적으로 바람직하다”며 “다만 아직 지방자치제가 뿌리를 내리지 못한 현 단계에서 유권자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1년반만에 정치판에 뛰어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말했다.

정세욱(鄭世煜·명지대 교수)한국지방자치학회 명예회장은 “자치단체장의 총선 출마를 법으로 규제할 수는 없지만 이는 법 이전에 정치적 책임과 윤리의 문제”라며 “자치단체장 자리를 중앙정치무대의 발판 정도로 여기는 후진적 정치문화를 바꿔야한다”고 지적했다.

▽선진국의 경우〓영국 프랑스 등 유럽 국가의 경우 대부분 지방자치단체장이 지방의회의장을 겸임하고 있으며 국회의원을 겸임하는 것도 가능하다. 미국이나 일본은 단체장과 의회의장을 따로 선출하지만 단체장의 국회의원 출마를 제한하는 법규정은 없다.

그러나 미국 일본의 경우 자치단체장이 임기중 국회의원 등으로 나가는 사례는 거의 없다. 보통 3, 4차례 이상 단체장을 연임한 뒤 ‘믿을 만한 정치인’으로 여론이 형성되면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한다.

<서정보·이진영·이명건기자>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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