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풍공작 파문/權씨 대선때 행적]陰地서 「DJ죽이기」

  • 입력 1998년 3월 20일 20시 08분


북풍공작 지휘혐의로 사법처리를 눈앞에 둔 권영해(權寧海)전안기부장은 대선기간내내 안기부의 정치적중립을 역설했다.

외형상으로 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의 ‘엄정중립’지침을 충실히 받든 것처럼 보였으나 안기부와 검찰의 수사결과 권전부장은 ‘표리부동(表裏不同)’의 행태를 보인 것으로 드러났다.

권전부장은 대선을 20여일 앞둘 때까지는 그래도 중립을 지켰다는 것이 정설이다. 당시만 해도 한나라당의 이회창(李會昌)후보가 두 아들의 병역기피의혹 등으로 고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법적으로 허용된 마지막 여론조사인 11월26일의 조사결과 이후보가 국민회의 김대중(金大中)후보를 바짝 따라붙는 것으로 나타난 직후부터 권전부장의 태도는 돌변했다. 이를 반전의 기회로 여긴 그와 구 안기부 고위세력들은 이후보의 당선과 ‘DJ죽이기’를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한 것으로 보인다.

맨처음 감지된 공작움직임은 11월말 안기부 고위간부들의 지방순회. 안기부간부들은 지방을 돌며 지부장들에게 ‘DJ가 대통령이 돼서는 안되는 이유’를 설파했다.

그때를 전후해 ‘김장수편지’에 이어 ‘김병식편지’ 등 각종 음해공작문건이 꼬리를 물었고 마침내 12월5일 안기부 고성진대공수사실장이 검찰청기자실에서 ‘오익제(吳益濟)편지사건’을 터뜨렸다.

‘흑금성’ 박채서(朴采緖)씨의 ‘제보’가 이때 빈번해진 것도 이같은 ‘전력투구’의 일환이었음이 입증됐다. 박씨는 고실장이 검찰청에 가는 도중 국민회의에 이 사실을 제보, 비상이 걸린 국민회의는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조세형(趙世衡)총재대행은 당시 김용태(金瑢泰)청와대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거세게 항의했다. 사실을 확인한 김전실장이 다시 전화를 걸어와 “김전대통령과 관련없다”고 부인했고 조대행은 김실장에게 “그렇다면 안기부를 막아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정황으로 미뤄 권전부장과 안기부는 김전대통령의 ‘수중’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국민회의는 권전부장에게 특사를 보냈다. C의원이 권전부장을 만나 “당신 이렇게 장난치다가 죽는다”고 ‘협박’했으나 그는 “절대 그런 일이 없다. 오해다”라고 발뺌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는 물밑으로 ‘윤홍준(尹泓俊)기자회견’을 위한 공작을 치밀하게 진행, 12월11일 ‘작품’을 만들어냈다.

이런 권전부장의 ‘DJ죽이기’는 선거때 뿐만 아니라 선거이후에도 북풍문건조작 등을 통해 계속됐다.

〈최영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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