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窓]정승호/「한탕」과 바꾼 양심

  • 입력 1998년 2월 15일 21시 01분


“은행에서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돈을 내줘 은행돈도 이렇게 쉽게 빼낼 수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15일 오전 전남 영광경찰서 조사계 사무실. 영광군 낙월도 낙월우체국 직원 거액인출사건의 공범 손정훈씨(47·강원 강릉시)가 초췌한 모습으로 조사를 받고 있었다. 손씨는 이른바 ‘현금 인출책’. 우체국 사무장 장철호씨(36)의 지시에 따라 직원 조지훈씨(23)가 전산단말기를 조작, 22개 은행에 입금한 78억9천여만원중 21억원을 인출해 주고 2억원을 받아 달아났다가 지난 12일 대구의 동생집에서 붙잡혔다. 낙월도 처가에 드나들면서 장씨 등과 알게 된 손씨는 설인 지난달 28일 서울의 한 여관에서 장씨의 ‘한탕 제의’를 받아들였다. 돈만 인출해 주면 그 액수의 10%를 주겠다는 말에 솔깃해진 것. “처음에는 가당치도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장씨가 모든 것은 우리가 책임지고 돈만 빼오면 사례금을 준다고 해서….” 조립식 건축업을 하다 농협에 4천여만원의 빚을 진 손씨는 대출금상환독촉이 심해지자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이들은 우체국장이 광주로 출장가는 2월6일을 ‘D데이’로 잡았다. 조씨가 단말기를 조작, 미리 개설해둔 시중은행 계좌에 입금한뒤 휴대전화로 연락하면 즉각 돈을 찾기로 각본을 짰다. 이날 손씨가 후배인 배병훈씨(38)와 함께 6시간 동안 서울시내 9개 은행에서 인출한 돈은 21억원. 라면박스 20여개 분량이었다. “가슴이 두근두근했지만 막상 은행에선 의외로 쉽게 돈을 내주었습니다. 위조한 주민등록증을 내밀었는데 확인할 생각도 않고…. 세상에 이런 일도 있나 싶었습니다.” 손씨는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다. 아무리 돈이 궁해도 죄는 짓지 말아야 하는건데…”라며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영광〓정승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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