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김길자/중년에 배운 스케이트

  • 입력 1997년 11월 10일 07시 46분


은반 위를 우아하게 나는 백조. 그 환상적인 모습을 항상 꿈으로만 생각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생각지도 않았던 스케이트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것도 쉰이 넘어 남들이 옷을 나이에…. 처음에는 칼날을 세우고 무녀 작두 타듯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빙판에 서니 발바닥이 아예 달라붙어 떼어 놓을 수조차 없었다. 벽을 붙잡고 V자로 한발한발 떼자니 돌 지난 아이의 걸음마보다 더 힘들었다. 얼음판 추위인데도 입이 바짝바짝 마르고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얼음판을 두려워하는 내게는 아픈 추억이 있다. 함박눈이 무릎을 덮던 초등학교 3학년 때 어느 겨울날이었다. 동생들과 대나무를 반으로 쪼개 앞끝을 불에 구운 뒤 위로 약간 치솟게 해서 만든 즉석스키로 눈밭 위를 달리는 그 상쾌한 기분이란…. 그맛에 취해 손발이 꽁꽁 얼어붙는 줄도 모르고 즐기다가 몸을 녹이기 위해 물이 팔팔 끓는 가마솥 위에 올라섰다. 지금 생각해도 그 철없던 시절이 아찔하기만 하다. 그때의 실수로 아직도 팔에는 흉터가 남아 있고 젊은날 오래도록 나를 속상하게 했었다. 밀고 모으고 밀고 모으고…. 기본 동작을 잘 익혀야 한다는데 생각대로 되지를 않는다. 마음으로야 멋진 백조처럼 지칠 수 있을 것 같은데 몸이 생각대로 따라주지 않는다. 하루는 은발의 노신사가 은반 위를 지그재그로 멋지게 돌고 있었다. 호기심에 다가가서 물어봤더니 젊은 시절 선수였다는 얘기다. 여든이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건강한 모습을 보면서 새삼스레 용기를 얻었다. 코치의 한마디 한마디는 때로는 힘이 되다가 때로는 절망을 주다가 한다. 나이 쉰에 왜 이짓을 하면서 이 고생일까. 곤혹스러운 표정이 되다가도 『그 나이에 대단한 용기』라는 코치와 젊은 친구들의 격려에 힘을 얻는다. 그런대로 이제는 빙판 위를 제법 돌아다니게 됐다. 욕심은 이만 내기로 하자. 마음이 울적할 때나 여름날 더위에 지칠 때 신나게 한바퀴 돌 수 있는 실력만 있으면 되겠지, 건강이 허락한다면 나도 은발이 성성해서도 한번씩 들어올 수 있었으면 한다. 스케이팅 왈츠가 은은하게 울려 퍼진다. 천천히 또 자연스럽게 한바퀴 돌고 나가야지. 김길자(광주 남구 월산4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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