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한 국군포로의 손녀, 서울에서 패션 디자이너가 되다 [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7월 2일 08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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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탈북한 권봄 씨. 대학교 때 학교 복도에서 찍은 사진이다.
패션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탈북한 권봄 씨. 대학교 때 학교 복도에서 찍은 사진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북에서 온 권봄이라고 합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동네에선 ‘패션여왕’이었어요. 학교에서 교복을 제일 먼저 고쳐 입은 사람이 바로 저였다니까요. 그런데 옷을 고칠 때마다 비판무대에 오르고, 강제노동까지 하고 너무 고초를 많이 겪었어요. 하지만 전 굴복하지 않았어요. 마침내 학교도 저에게만 예외를 인정하고 포기할 정도였답니다.

학교를 졸업할 때 생각해보니 북한이란 곳은 저에게 너무 맞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고등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탈북했습니다. 지금은 서울에서 패션 디자이너로 제가 원하는 바로 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제가 살아온 인생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대학 시절 자신이 직접 제작한 옷을 입고 사진을 찍었다.
대학 시절 자신이 직접 제작한 옷을 입고 사진을 찍었다.


● 국군포로의 손녀


저는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한 그 해에 북한의 북부 국경 한 소도시에서 태어났어요. 태어나보니, 저의 출신성분은 아주 꽝이던데요. 제가 국군포로의 손녀였던 것이죠.

할아버지는 충북 제천에서 살다가 1951년 국군 8사단에 입대해 백마고지 전투, 금화지구 전투 등에서 용감히 싸웠다고 해요. 하지만 불행하게도 정전협정이 체결되기 한 달 전에 포로로 잡혔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북한은 할아버지와 같은 국군포로들을 북부 지방의 탄광에 보냈습니다.

저는 할아버지 얼굴도 몰라요. 1970년대 말에 탄광에서 탄차 사고로 사망했다고 해요. 포로들은 언제 죽어도 되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가장 위험한 곳에서 일을 시켰다고 합니다.

할아버지 때문에 아빠는 북한에서 제대로 된 직장도 가져본 적이 없어요. 반동의 아들인데다, 아빠 친척들은 다 남쪽에 살고 있으니 어려서부터 주먹을 쓰면서 방황했나 봅니다.

하지만 제가 태어나보니 우리 집은 동네에서 제일 잘 사는 부자이기도 했어요. 왜냐하면 엄마가 일찍 장사를 시작해 돈을 많이 벌었기 때문이죠. 엄마의 친척들이 중국에 많았는데, 거기서 물건을 가져다 북한에서 팔았어요.

엄마는 아버지가 싸울 때 돌려차기 하는 모습에 반했다고 하네요. 흐흐. 엄마는 키가 작았는데, 아빠는 키도 훤칠하고 잘 생겼는데다 돌려차기까지 기막히게 잘 했나 봅니다. 결혼한 이후에도 아빠는 안 좋은 성분 때문에 주로 집안일을 하고, 대신 엄마가 밖에 나가 장사를 했어요.

한옥마을에서 한복을 입고 포즈를 취한 권봄 씨.
한옥마을에서 한복을 입고 포즈를 취한 권봄 씨.


저는 7살에 인민학교에 입학했는데 그 이전 기억은 별로 나지 않아요. 두 가지는 아직 생생한데, 하나는 유치원에서 신발을 계속 잃어버렸어요. 제가 우리 유치원에서 제일 좋은 신발을 신었는데, 누가 자꾸 훔쳐가 팔았던 거죠.

그리고 어느 날 장마당 앞을 지나다 바닥에 갓난아기가 버려진 것을 보고 데려가자고 엄마에게 떼를 썼던 기억이 나요. 그때 병원이랑 장마당에 아이를 버리고 가는 일들이 종종 있었어요. 저는 북한에서 사람들이 굶어죽었다는 ‘고난의 행군’에 대한 기억은 없어요. 엄마가 장사를 잘 한 덕분에 집에 없는 게 없었고, 밥투정을 하면서 살았거든요.

2001년에 인민학교에 들어갔는데, 제가 그때 학년에서 키가 제일 컸어요. 그래서 무용소조에 뽑혀서 춤을 추었어요.

4학년 때엔 선생님과 다른 아이 2명과 함께 평양 무용축전에도 갔어요. TV로만 보고 말로만 듣던 평양에 도착해서 어느 여관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얼굴부터 온 몸이 다 새까맣게 됐어요. 살펴보니 이불을 언제 빨았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더러웠어요.

선생님이 기겁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 여관 주변 개인집에 돈을 더 주면서 숙박했어요. 그런데 집주인 아주머니가 밥을 너무 조금만 줘서 배고프다고 선생님께 일러 선생님과 집주인이 대판 싸우는 웃픈 해프닝도 있었어요. 그때 축전 기간 한 달 반을 평양에 머물면서 그 유명한 옥류관도 가보고 놀이동산도 갈 수 있어 좋았는데, 아쉽게 등수에는 들지 못했어요. 그래도 좋은 경험이었고, 추억이라 생각해요.

중학교 올라가서도 저는 무용소조란 이유로 농촌동원도 가지 않았고, 보름동안 군사훈련을 받는 붉은 청년근위대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학생소년회관에서 15살까지 계속 춤을 췄는데, 그 덕은 요즘 좀 봅니다. 패션 콘텐츠를 다루려고 만든 유튜브에 요즘 댄스 챌린지 영상을 올리고 있거든요. 구독자는 아직 많지 않지만, ‘봄패션TV’를 찾아보면 제가 춤을 추는 영상이 많아요. 어릴 적 배운 춤이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은 몰랐네요.

대학 시절 교복을 입고 찍은 사진.
대학 시절 교복을 입고 찍은 사진.


● 한국 패션에 빠지다


저는 중학교 때 안 본 한국 드라마가 없는 것 같아요. 집이 잘 살았다고 했잖아요. 동네에서 DVD 플레이어를 제일 먼저 산 것도 우리 집이었어요.

동네 사람들이 한국 드라마 CD를 구하면 우리 집에 다들 보려 왔던 기억이 나요. 창문은 불빛이 새나가지 못하게 늘 담요로 가려져 있었고요.

제가 열 살 때인가 한번 단속에 걸리긴 했지만, 그 이후로도 계속 봤어요. 단속받던 때의 일은 충격이었어요. 안전원이 신발을 신고 집에 들어와서 엄마를 마구 때렸거든요. 엄마가 매를 맞는 걸 보면서 어린 저는 무서워서 그냥 울 수밖에 없었어요.

아침 저녁으로 한국 드라마만 보다 보니 그만 제가 사는 세계의 기준이 한국이 돼버렸어요. 한국 배우들의 옷과 패션에 늘 관심이 갔어요. 몸은 북한에 있지만, 마음과 생각은 북한 밖에 늘 머물러 있었어요.

13살 때인가 교복을 받았는데, 너무 치마가 길어요. 그래서 치마를 다 뜯어서 몸에 맞게 짧게 고쳐 입고 학교에 갔는데 난리가 난거죠. 학교에서 교복 고쳐 입고 온 학생이 제가 처음이라는 거예요. 그날 엄청 욕을 먹고 학교 청소를 저녁 늦게까지 해야 했어요.

그런데 반발심이 생기더라고요. 큰 걸 내 몸에 맞게 고쳤을 뿐인데 그게 왜 이리 야단맞을 일인가 싶었어요.

사춘기까지 찾아오니 반항심이 더 커졌죠. 학교에서 머리를 제일 기른 것도, 손톱을 기르고 매니큐어를 처음 바른 것도, 귀걸이 하느라 귀에 구멍을 뚫은 것도 저였어요. 다 제가 선구자였어요. 하하. 제가 하는 건 다 한국 드라마에서 본 것이었죠.

우리 학교에서 제가 인기 짱이었어요. 남학생들이 계속 쫓아다녔고, 여학생들도 저를 부럽게 쳐다봤어요. 그들은 용기가 없으니 주는 교복을 그대로 입고 다니는 거죠.

대신 대가는 컸죠. 학교에서 제일 많이 욕을 먹고, 길거리 걸어가도 규찰대가 가만 두지 않았어요. 잡혀가서 욕을 먹고 청소하는 게 일상이었죠.

그때마다 학교에 안 간다고 선포했어요. 몇 년 뒤엔 학교에서도 포기했죠. 선생님이 찾아와서 너만 머리 기르는 것을 특별히 허락할 테니 학교에선 머리를 묶고 다니란 조건을 내걸었어요.

저는 북한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잠 들 때였어요. 한국 드라마를 보고 ‘여주인공들이 입은 저 옷을 내가 입으면 어떨까. 너무 행복할거야’ 이런 상상을 하면서 잠들었거든요. ‘북한은 왜 이리 개성이 없는 곳일까, 한국은 누구나 예쁜 옷들을 입을 수 있는데 왜 북한은 예쁜 옷을 입을 자유도 없을까’하고 원망도 많이 했고요.

제가 왜 패션에 이렇게 집착했는지 생각해보면 그건 유전인 것 같아요. 엄마가 그랬어요. 한 겨울에도 롱코트에 롱부츠를 신고 거리를 다니는 멋쟁이였어요. 엄마는 무슨 옷을 사면 늘 ‘어떻게 하면 이 옷을 북에 없는 스타일로 만들까’ 그런 고민을 했고, 뜯어 고치는 것이 취미였어요. 저도 어렸을 때 엄마가 카라가 있는 옷을 사와서 뜯어낸 뒤 다시 만들어낸 옷을 입고 다녔고요.

한국 드라마와 패션 감각이 남달랐던 엄마 덕분에 저도 크면 무조건 옷을 만드는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북한에선 제 패션에 대한 열정과 자유가 너무나 통제되고, 늘 비판 대상이었죠.

학교를 졸업하면 무조건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자유로운 세상으로 가서 저만의 옷을 마음 껏 만들고 싶었어요.

회사에서 제품 제작을 위한 작업을 진행하는 권봄 씨.
회사에서 제품 제작을 위한 작업을 진행하는 권봄 씨.


● 부모에게도 알리지 않은 탈북


2011년 마침내 중고등학교를 졸업했어요. 그때가 17살이었죠. 졸업해서 몇 달 뒤에 저는 탈북했지요. 부모님도 제가 한국으로 가려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언제 갈지는 몰랐어요.

우리 동네엔 중국으로 몰래 사람을 넘겨주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저는 부모님에게 말도 하지 않고 길을 떠났어요. 말하면 못가게 했을 겁니다.

저는 두만강을 넘어 연길 친척집에 찾아갔어요. 거기서 한국에 보내달라고 했지요.

한국행 선을 찾는데 시간이 좀 걸렸어요. 거의 1년을 기다렸거든요. 연길은 참 큰 도시였어요. 도로가 뻥 뚫리고 차도 참 많았죠. 연길에 가서 바나나가 노란 색이란 것을 처음 알았어요. 북한 장마당에도 바나나를 팔긴 했는데 다 새까만 색이었거든요.

연길 사람들의 패션은 별로 인상적이지 않았어요. 제 눈높이가 한국에 맞춰져 있어서 그랬나 봐요. 그러다가도 가끔 길거리에서 멋있게 입고 다니는 아가씨들을 보면 ‘그래 이 정도는 입고 다녀야 패션스타지’하는 생각을 했죠.

2012년에 드디어 한국으로 떠났어요. 일행은 8명이었는데 동남아에 와서 산을 넘을 때면 제가 앞장섰어요. 무용을 해서인지 체력이 좋은 편이거든요. 그런데 산에 갈 때도 저는 패션이 중요해요. 한국에 와서 산행을 종종 하는데, 저번 겨울에 관악산에도 가죽 재킷에 요가 바지를 입고, 롱부츠를 신고 올라갔거든요. 하하. 등산화가 예쁘지 않아서 안 신어요. 이 정도면 정말 패션에 미친 것이 맞겠죠.

태국 감옥에 몇 달 있다가 꿈에도 그리던 한국에 2012년 9월에 왔고, 2013년 1월 마침내 대한민국 주민등록증을 받고 사회에 나왔어요.

패션을 포기할 수 없는 그는 산에도 롱부츠를 신고 오른다고 했다. 관악산에 오른 권봄 씨.
패션을 포기할 수 없는 그는 산에도 롱부츠를 신고 오른다고 했다. 관악산에 오른 권봄 씨.


● 디자인 전공 대학에 입학하다


사회에 나왔는데 저는 어려서인지 집을 주지 않더군요. 그래서 서울에 있는, 먼저 탈북해 살고 있는 엄마 친구네 집에 들어갔어요. 거기서 한 반 년 살다가 쫓겨났어요. 제가 철이 너무 없었거든요.

멋 부리고, 이모 화장품 잔뜩 바르고 외출할 생각이나 했지, 청소할 줄도, 밥을 할 줄도 몰랐어요. 이모가 ‘너 이렇게 살면 절대 철이 들지 않는다. 나가 혼자 살면서 사회를 경험해보라’고 하더군요. 돈이 없으니 금천구에 8평짜리 반지하방을 월세로 얻었는데 너무 눈물이 났어요. 집이 작아서 변기 위에서 샤워해야 했죠. 그런 생활을 하면서 ‘자유로운 삶을 살려면 여기서도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죠.

혼자 살 때 할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어요. 할아버지가 포로가 될 때 나이가 20살 때인가 됐거든요. ‘그 어린 나이에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 고향과 제일 멀리 떨어진 북단의 탄광으로 끌려 와서 혼자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반동분자 성분에다가 탄광의 가장 위험한 막장에서 다시 갈 수 없는 고향과 보고 싶은 가족을 그리며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셨을까’하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군에 입대하던 때 나이와 비슷한 나이에 저는 홀로 북에서 남으로 와서 다시 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고 있잖아요. 하지만 온갖 차별과 멸시를 받으며 살았던 할아버지에 비하면 저의 삶은 너무나 행복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저 자신이 너무 철이 없다고 느껴졌어요.

그래서 독하게 살기로 마음먹고, 대안학교에 입학해 기숙사에 들어갔어요. 목표를 홍익대 패션디자인학과로 높게 잡았는데, 그동안 공부를 많이 못해서 많은 준비가 필요했어요. 검정고시를 치고 대학에 갈 수도 있었지만, ‘패션계의 여왕’이 되려면 이왕 제대로 공부하고 대학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죠. 4년 가까이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고등학교 과정을 다시 다녔어요. 1년은 미술학원에서 전문적으로 그림을 배웠고요. 지금 돌아보면 그때 기숙사 사감 선생님이 참 무섭게 저를 잘 잡아주어서 고마워요.

2017년에 마침내 홍익대 미술대학 섬유미술패션디자인과에 입학했어요. 실기 시험 때 작가의 그림을 내걸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려 교수님들 앞에서 발표하는 시험이 인상적이었어요. 작가의 의도는 무엇이고, 나는 왜 이 그림을 이렇게 각색했는지 설명하는 것이었는데, 창의력과 이해력을 보려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이런 것은 자신이 있어요.

대학에 가서도 공부는 어렵지 않았어요. 저는 패션에 살고 죽는 아이니까 정말 열심히 공부했죠. 교수님의 칭찬에 살고, 질타에 울면서 대학을 다녔어요. ‘네 작품이 창의적이다’고 칭찬 받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행복했고요, ‘작품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는 식의 평가를 받으면 온 밤 자지 않고 ‘문제점이 뭘까’ 고민했습니다.

그렇게 대학을 다니다 보니 전공과목은 올 A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전공만 집중적으로 공부했더니 교양과목 성적은 좀 별로예요. 묻지 마세요.

대학 다니면서 저는 탈북민이란 얘기를 절대 하지 않았어요. 가까운 친구들도 제가 충북 제천 출신인 줄로 알아요. 할아버지 고향이 제천이거든요. 또래보다 나이가 많은 것은 ‘춤 쪽으로 가려다가 안 돼서 공부하러 왔다’고 둘러댔어요. 이 기사 나가면 다들 놀랄 걸 생각하니 걱정이예요. 사정이 있었던 걸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요.

탈북민임을 숨기고 살다보니 장학금은 하나도 받지 못했어요. 대신 많은 알바를 뛰면서 생활비를 충당하느라 고생했어요.

대학 시절 만든 가방 작품 앞에서 사진을 찍은 권봄 씨.
대학 시절 만든 가방 작품 앞에서 사진을 찍은 권봄 씨.


● 회사에서 배운 술의 쓴 맛


저는 2022년 2월에 졸업했는데, 재학 중에 조기 취직해서 올해로 3년차가 되었어요. 처음 동대문에 있는 중소기업 디자이너로 들어갔는데, 1년 버티고 나왔어요. 여초 직장이라 그런지 군기가 엄청 센데, 제가 막내라 온갖 잡다한 일들은 다 제 몫이었죠.

술의 쓴 맛을 회사에 들어가 처음 알았어요. 대학 때는 술을 아예 마실 줄도 모르지만, 알바로 돈을 벌다 보니 술 살 돈이 아까워서 사 마신 적이 없어요. 그런데 회사 생활이 너무 힘들어 하루는 퇴근하면서 소주 한 병을 사들고 들어가 딱 한 잔하고 정신 잃고 잠들었답니다. 하하.

회사 생활은 대학 때와 전혀 달랐어요. 대학 다닐 때 저는 내내 삶이 신나고 늘 행복했어요. 제가 직접 피팅을 하고 옷을 만드는 걸 상상만 해도 그렇게 신날 수 없고, 세상에 없는 나만의 옷이 완성됐을 때를 생각하면 행복해서 잠을 잘 수가 없었거든요.

3학년 때 저는 제 패션이 가야 할 방향과 가치관을 정했어요. ‘패션에 역사를 입히자’고 결심한 거죠. 저는 이 땅에서 이방인처럼 살고 있지만, 역사는 남과 북이 다 같이 공유할 수 있는 거잖아요. ‘한국의 역사를 새로운 차원에서 발전시키는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것이 제 삶의 목표입니다. 말이 거창해서 이해가 되지 않으시죠. 심플하게 말하면 그냥 전통의상에 현대를 입히는 것이 제 패션의 철학입니다. 좀 더 짧게 말하면 퓨전 한복이죠. 한복을 모티브로 해서 그 요소들을 현대 의상에 구현하는 겁니다.

한복은 전 세계가 아는 옷이긴 하지만, 일상에서 입고 다니기엔 거추장스러워서 잘 입지는 않죠. 저는 일상에서 입고 다니는 간편한 한복을 제작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회사에 들어가니 꿈이 다 뭐예요. 늘 욕을 먹고 수습하느라 밤을 새고, ‘드라마 미생에 나오는 것처럼, 신입 회사원 생활이 이런 거구나’를 뼈저리게 배웠죠.

1년쯤 일하다가 다른 중소기업에 경력직 정직원으로 이직했습니다. 지금 2년째 일하고 있는데, 이 회사는 첫 직장보다 좀 더 큰 중견기업입니다. 자체 브랜드도 3개나 있고요. 저는 그중 한 브랜드의 패션디자이너로 일하고 있고 마케팅도 담당하고 있어 좀 바쁘지만, 나름 재밌게 잘 다니고 있어요. 저는 한국에 와서 거의 10년 만에 패션 디자이너의 꿈을 이뤘답니다.

클라우드 펀딩 사이트에 올린 권 씨의 작품. 여성 모델이 권봄 씨 자신이다.
클라우드 펀딩 사이트에 올린 권 씨의 작품. 여성 모델이 권봄 씨 자신이다.


● 탈북 디자이너의 소원


지난달 중순에 저는 홍대와 사당, 성신여대 사거리에서 3일 동안 그림판을 들고 서 있었어요. 왜냐면요. 제가 제 브랜드를 내건 첫 작품을 만들었거든요. 브랜드는 제 이름 첫 글자를 따서 ‘GB‘로 지었습니다.

대학시절부터 지금까지 과정은 아이디어와 디자이너 경험을 쌓는 과정이었고, 이젠 드디어 그걸 다 녹여서 세상에 처음 제 작품을 공개하는거죠.

길거리에서 이 옷에 대한 평가를 해달라고 부탁했더니 많은 분들이 좋은 평가를 남겨주었어요. ‘독특하고 기발하다, 편안해 보인다, 참신하다’ 등 이런 평가를 받으니 너무 기분이 좋았어요.

저는 제 작품을 클라우드 펀딩 사이트인 ‘텀블벅’에 올렸어요. 제가 직접 모델로 나섰고요. 이건 제게 정말 중요한 일이거든요. 그런데 결과가 좋지 않아 너무 고민입니다. 이달 7일까지 목표 금액을 300만 원으로 세웠는데, 지금까지 목표의 8%밖에 달성하지 못했어요. 한 벌이 12만8000원이고, 커플 세트가 25만6000원인데, 지금 딱 한 세트만 팔렸어요. 15세트는 팔아야 하는데 큰 일이예요. 기자님, 제 작품 사이트 꼭 좀 소개시켜 줄 거죠?

(※권봄 디자이너 작품 링크 → https://tumblbug.com/gbh)

저는 퓨전 한복이 대중화됐으면 좋겠어요. 우리의 역사가 담긴 한복은 지금 너무 한복스럽게, 딱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요. 저는 한복적인 요소를 담은 옷을 창작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퓨전한복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요.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되면 꼭 판문점에서 ‘통일 패션쇼’를 열거에요. 남과 북의 모델을 써서요. 상상만 해도 너무 행복해요. 그런 날이 꼭 오겠죠?

그리고 통일이 되면 제일 먼저 고향에 묻힌 할아버지 유해를 고향에 모셔오고 싶어요. 남쪽에 와서 할아버지 자료를 보니 전사자로는 기록돼 있는데, 현충원엔 묘가 없어요. 할아버지 묘비 앞에서 ‘할아버지가 목숨 바쳐 대한민국을 지켜주신 덕분에 손녀가 꿈을 이뤘어요’라고 말하고 싶어요. 제 꿈이 너무 거창한가요. 사실 소박하지만 꼭 이루고 싶은 꿈도 또 있어요.

그게 뭐냐면 유재석, 조세호 씨에게 제가 만든 세계에서 유일한 디자인의 한복 정장을 선물하고 싶어요. 제가 유키즈 광팬이거든요.”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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