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 속 더 탄탄해진 동맹… 한반도 안보협력 넘어 글로벌 파트너로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4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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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동맹 70년]
反美 시위-광우병논란 등 굴곡
이해관계 조율하며 70년 동행

올해 70주년을 맞은 한미동맹은 숱한 굴곡을 거쳐 그 틀을 굳건히 다져 왔다. 북한의 침략을 막고 공산권을 견제하기 위해 맺었던 단선적 관계에서 한국의 경제성장 고도화, 미국의 아시아 정책 변화, 우리 국내의 역동적인 정치 상황, 시시각각 변하는 외부 위협들에 대한 양국의 대응 과정 등이 어우러지면서 한반도 안보를 지탱하는 복합 중추로 진화했다.

한미동맹의 시작은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면서부터다. 6·25전쟁 정전협정을 체결한 지 두 달이 조금 지난 시점 이승만 대통령이 전쟁 중단을 대가로 미국에 안전보장책을 요구하면서 이뤄졌다. 이 무렵 공산권의 세력 확장을 우려한 미국의 이해관계 등과 맞물리면서 군사동맹으로 탄생했다. 이 조약에 따라 한미가 외부 무력 공격에 상호 협의하고 대처하기 위한 주한미군도 한국 영토에 배치됐다.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방위비분담특별협정(SMA) 등의 주요 골격이 갖춰진 것이다.

사실 이때 한미동맹의 법적 근간이 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취약했다. 한쪽이 파기를 통고하면 1년 후에 자동 폐기되는 상황이었기 때문.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결정한 주요한 이유 중 하나는 그래서였다. 박 대통령은 1964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군 역대 최다인 연인원 32만여 명을 전장에 보내 미국을 도왔다. 이후 정부는 파병 대가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유사시 미군의 한반도 자동 개입’ 조항을 추가했다. 주한미군 감축도 중단해 달라고 요구했다.

박정희 정부는 1968년 한미연례안보협의회의(SCM)도 시작했다. 1968년 청와대 기습 사건, 1976년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등 북한이 도발했지만 오히려 한미는 이를 계기로 철통같은 동맹 의지를 다졌다. 한미 연합훈련과 양국 국방장관 회동 등 다른 동맹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한미동맹만의 특장점이 이때부터 발현됐다.

일부 반미 여론 등이 촉발되면서 한미동맹이 흔들리는 변곡점도 있었다. 2002년 6월 13일 경기 양주시 국도에서 여중생 효순 미선 양이 미군 장갑차에 치여 목숨을 잃은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 사건’이 대표적이다. 들끓던 민심은 미국을 향한 분노로 표출됐다. 다만 이를 계기로 이후 미 정부가 한국 여론을 무시하지 않고 더욱 귀를 기울이는 계기도 됐다.

2003년 2월 취임한 노무현 대통령은 일부 국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라크 파병을 결정하는 등 한미동맹 정신을 이어갔다. 한미는 2007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전 협상부터 발효까지 진통을 겪기도 했다. ‘광우병 논란’도 한반도를 강타했다. 이에 2008년 미국산 소고기의 자유무역협정(FTA) 수입 등을 반대하는 촛불시위도 이어졌다.

위기가 있었지만 한미동맹은 끈끈하게 유지됐다. 한국은 2016년 7월 주한미군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를 결정하면서 중국으로부터 경제보복을 받았지만 한미동맹 강화 등을 이유로 감내했다. 문재인 정부 당시 남북, 북미, 남북미 정상회담을 거치면서 한국과 미국은 “동맹 간에도 입장과 이해관계가 다를 수 있고 서로 존중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이제 한미동맹은 단순한 안보협력을 뛰어넘어 경제안보까지 망라하는 포괄적 전략동맹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북한이 6차례 핵실험을 감행하고 미 본토를 겨냥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까지 시험 발사하는 등 도발을 이어가고 있지만 한미동맹은 오히려 더욱 탄탄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신나리 기자 journari@donga.com
#한미동맹#한미동맹 70년#한반도 안보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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