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 여가부의 혹독한 성인식 [박성민의 더블케어]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7월 10일 11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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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민·하태경 “여가부 폐지” 대선 공약…“이젠 졸업할 때 됐다”
미니 부처의 한계… 권력형 성범죄 미온적 대처에 여성들도 “실망”
“업무 이관, 위원회 형태로는 업무 추진력 얻기 힘들어” 반론도




출범 20년을 맞은 여성가족부가 혹독한 성인식을 치르고 있다. 툭하면 ‘무용론’ ‘폐지론’에 휩싸이더니 최근엔 야권 대선 주자들까지 이를 공론화하고 있다. 국민의힘 대선주자인 유승민 전 의원과 하태경 의원은 여가부 폐지를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다. 이들은 “여가부 장관은 정치인이나 대선캠프 인사에게 전리품으로 주는 자리”(유 전 의원), “여가부가 젠더갈등을 부추겨왔다”(하 의원) 등의 날 선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유승민 전 의원은 최근 페이스북에 두 차례 글을 올려 “여성가족부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아일보 DB
유승민 전 의원은 최근 페이스북에 두 차례 글을 올려 “여성가족부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아일보 DB


여가부 폐지에 힘을 싣는 듯했던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논란이 커지자 8일 “(당론 채택은) 숙의를 거쳐야 한다”고 한 발 물러섰지만 “정부 효율화 측면에서 특임부처를 없애자는 취지로 가면 광범위한 국민 지지가 있을 것”이라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여가부는 어쩌다 이렇게 동네북 신세가 됐을까. 여가부의 어제와 오늘을 들여다보며 존폐론을 둘러싼 궁금증을 짚어보았다.

이복실 전 여성가족부 차관은 8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같은 정책도 어느 부처가 추진하느냐에 따라 추진력과 정책 방향이 달라진다”며 여성가족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복실 전 차관 제공
이복실 전 여성가족부 차관은 8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같은 정책도 어느 부처가 추진하느냐에 따라 추진력과 정책 방향이 달라진다”며 여성가족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복실 전 차관 제공


20년 가까이 정부 여성 관련 업무를 경험한 이복실 전 차관(세계여성이사협회 한국지부 회장)에게 여가부에 대한 비판에서 무엇이 맞고 틀린지 물었다. 이 전 차관은 1998년 대통령직속 여성특별위원회 출범 당시 과장으로 부임한 뒤 차별개선국장, 대변인, 청소년가족정책실장 등을 거쳐 2014년까지 여가부에 몸담았다. 그는 친정을 향해 “현 정부 들어 여가부가 정치 논리에 휘둘리는 모습으로 위기를 자초했다”며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 ‘스무 살’ 여가부, 졸업할 때 됐다?

‘여가부 무용론’의 근거 중 하나는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양성평등이 많이 이뤄져 여성 이슈 전담 부처가 더 이상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젊은 남성들 사이에선 “부모 시대에는 남녀 불평등이 만연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오히려 남자들이 역차별 받고 있다”는 인식도 팽배하다. ‘정부 각 부처에서 양성평등 업무를 하는데 왜 굳이 여가부가 필요하느냐’는 정치권 일부 주장도 이와 궤를 같이한다. 하태경 의원은 “이제 졸업할 때가 됐다”고도 했다.

이 전 차관은 “아직도 여성들의 유리천장이 공고하고, 사회 곳곳에 성별 격차가 여전하다”고 반박했다. 이준석 대표가 줄곧 비판해 온 ‘여성 할당제’에 대해서도 “국회 비례대표 50% 여성 할당 의무화 등 그동안 여성 진입이 어려웠던 분야에 제한적으로 시행됐을 뿐 민간 영역에선 아직 여성들이 취업이나 경력을 이어가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아직은 여가부가 여성의 공간을 늘리는 데 버팀목이 돼야 한다는 의미다.

올 3월 발표된 세계경제포럼(WEF) ‘2021 성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92위), 유사 업무 시 
성별 임금 평등(116위), 추정 소득(119위), 관리직 비율(134위), 전문직 비율(80위)은 대부분 하위권으로 나타났다.
올 3월 발표된 세계경제포럼(WEF) ‘2021 성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92위), 유사 업무 시 성별 임금 평등(116위), 추정 소득(119위), 관리직 비율(134위), 전문직 비율(80위)은 대부분 하위권으로 나타났다.


여성이 느끼는 불평등은 통계로도 나타난다. 세계경제포럼(WEF)이 올 3월 발표한 ‘세계 성 격차 지수(GGI·Gender gap index)’에 따르면 한국은 156개국 중 102위에 그쳤다. 고위 임원 및 관리직 여성 비율은 134위, 추정 소득 119위, 유사 업무 임금 격차 116위 등으로 ‘경제 참여와 기회’ 부문의 불평등이 특히 심했다.

● 업무 중복, 비효율… 폐지냐 개편이냐

여가부의 업무 영역이 타 부처와 중복돼 비효율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여가부를 폐지해야 한다는 측에선 “현재의 여가부 업무를 유관 부처로 넘기고, 대통령직속 위원회가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 전 의원은 “여성의 취업, 경력 단절 등은 고용노동부, 아동 양육과 돌봄은 보건복지부와 교육부, 성범죄 등의 문제는 법무부와 검찰, 경찰이 담당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전 차관도 “각 부처별 업무 배분은 보다 효율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가령 현재 청소년 업무는 여가부, 아동은 복지부가 담당하는 데 굳이 나눌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아동 부문에서도 어린이집 등 시설 보육은 복지부, 아이돌보미 같은 방문 보육은 여가부가 맡고 있다. 또 아동의 학대 사건은 복지부, 성폭력은 여가부가 담당하는 데 주관 부처를 하나로 통일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명박 정부는 2008년 출범 직후 여성가족부를 여성부로 축소 개편했지만 2년 만인 2010년 청소년과 가족 업무를 이관해 
여성가족부로 확대했다. 2008년 3월 변도윤 전 장관에게 이 전 대통령이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이명박 정부는 2008년 출범 직후 여성가족부를 여성부로 축소 개편했지만 2년 만인 2010년 청소년과 가족 업무를 이관해 여성가족부로 확대했다. 2008년 3월 변도윤 전 장관에게 이 전 대통령이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하지만 업무의 효율적인 조정과 부처 폐지는 다른 문제라는 게 여가부 존치론자들의 주장이다. 이 전 차관은 “장차관이 추진하던 업무를 각 부처의 실, 국, 과에서 맡으면 정책 동력이 떨어지고 부처 내 업무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2014년 한부모 가정의 양육비 이행 지원법을 통과시킨 것도, 10년 넘게 법안을 준비하고 장차관이 기획재정부를 설득해 기구 설립을 이끌어 낸 결과”라고 덧붙였다.

이 전 차관은 김대중 정부 시절 정무장관(제2)실부터 여성특별위원회, 여성부로 이어지는 업무 소관 변경 과정을 현장에서 지켜봤다. 그는 “독립된 부처로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는 장관이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무회의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점”이라며 “정부 내 각종 위원회가 넘치지만 국무회의 의결권도, 정책 실행 권한도 없어 유명무실한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 왜 여성들마저 “여가부 잘못 운영” 지적할까

여가부는 호주제 폐지, 성폭력 피해자 지원 조직인 해바라기 센터 설립, 성매매 피해자 보호, 직장 내 성희롱 근절, 아이돌보미 사업 등 다른 부처가 챙기지 못하는 이슈와 정책을 성평등 관점에서 꾸준히 제기해 왔다.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여가부에 대한 여론은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 남성들에게는 “여성만을 위한 조직”이라는 거부감이 크다면, 여성들은 “존재 의미가 뭔지 모르겠다”고 비판한다. 지난해 12월 김정재 국민의힘 의원실이 의뢰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72.3%가 ‘여가부가 잘못 운영되고 있다’고 답했는데, 남성(71.4%)보다 여성(74.3%)의 비판 목소리가 높았다.

서울과 부산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지난해 11월 “성인지 학습 기회” 발언으로 논란을 빚은 이정옥 전 장관.  동아일보 DB
서울과 부산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지난해 11월 “성인지 학습 기회” 발언으로 논란을 빚은 이정옥 전 장관. 동아일보 DB


부정적인 여론은 여가부가 자초한 측면도 적지 않다. 여가부는 윤미향 의원이 이사장을 맡았던 정의기억연대의 회계부정 의혹을 진상 조사하겠다며 국회가 자료 제출을 요구했을 때 끝내 응하지 않았다. 여당 소속 광역자치단체장들의 권력형 성범죄가 잇따랐을 때 피해 여성을 보호하기는커녕 정권의 눈치를 살피는데 급급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정옥 전 장관은 서울과 부산시장 보궐선거가 치러지게 된 것에 대해 “국민 전체가 성인지 집단학습을 할 수 있는 기회”라고 발언해 사실상 경질되기도 했다.

이 전 차관은 “현 정부에서 젠더 이슈가 터졌을 때 여가부가 제 목소리를 낸 건 정현백 전 장관이 과거 여성 비하 발언으로 논란을 빚은 탁현민 청와대 행정관의 경질을 주장했던 순간밖에 없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권력형 성범죄 피해자들에게 여당이 ‘피해 호소인’ 운운했을 때 가만히 있는 여가부를 보며 여성들은 ‘여가부는 피해 여성의 권익은 뒷전이고 정치권의 눈치만 본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 “여가부는 정부 내 야당…정파 관계없이 싫은 소리 내야”


여가부 폐지론이 야권의 공식 대선 공약이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여당은 폐지 주장에 강하게 반대하고 있고, 야권 대선 후보군에서도 윤석열 전 검찰총장, 홍준표 국민의힘 의원 등은 ‘신중론’을 유지하고 있다.

대선 출마를 선언한 윤희숙 국민의힘 의원은 “여가부를 폐지한다고 문제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며 “양성평등가족부로 개편해 역할을 재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희룡 제주도지사 역시 “무슨 일이 생기면 ‘해경을 없앤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를 없앤다’고 접근하는 것은 대안세력으로서의 신뢰를 떨어뜨린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여가부가 스스로 존재 이유를 증명하지 않는 이상 ‘무용론’ ‘폐지론’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정치에 휘둘리는 구태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이 전 차관은 “여가부가 정부 내 야당 역할이라는 기본 위치를 잊어선 안 된다”고 조언했다. 그는 “청와대나 공룡 부처들이 기존 관습에 얽매여 있을 때 양성평등에 기반한 새로운 의제를 개발하고 정부와 여당이 듣기 싫은 소리도 꾸준히 낼 수 있어야 한다”며 “젊은 세대에게 필요한 정책과 비전으로 조직의 신뢰를 되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박성민 기자 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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