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과 노무현, 김영삼, 김종필

  • 입력 2009년 8월 18일 14시 05분


지난 1997년 4월1일 청와대에서 열린 여야 영수회담에서 김영삼 대통령과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가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997년 4월1일 청와대에서 열린 여야 영수회담에서 김영삼 대통령과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가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정치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세 명의 정치인이 있다. DJ 정권을 승계한 노무현 전 대통령, 평생의 정치적 동반자이자 라이벌이었던 김영삼(YS) 전 대통령, 그리고 한때 공동정권을 이뤘지만 오래 못 가 결별한 김종필(JP) 전 자민련 총재다.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갈등한 이들 '3김(金)'은 한국 정치사에 진한 애증의 드라마를 남겼다.

DJ와 노 전 대통령이 본격적으로 정치적 관계를 형성한 것은 1997년 대선 때였다. 노 전 대통령은 1988년 13대 총선을 앞두고 YS의 제의로 통일민주당에 입당해 정치를 시작했다. 하지만 YS가 1990년 통일민주당과 민주정의당, 신민주공화당을 합치는 3당 합당을 하자 결별하고 DJ의 통합민주당에 합류했다. 1995년 DJ가 대선 도전을 위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을 때도 한때 '야권 분열'이라며 합류를 거부했다.

DJ가 정계은퇴를 번복하고 1997년 대선에 출마했을 때 국민회의 부총재였던 노 전 대통령은 수도권 특별유세단장을 맡아 DJ 정권의 탄생에 일조했다. 2000년 16대 총선 때 노 전 대통령이 부산에서 출마했다 떨어지자 DJ는 그에게 해양수산부 장관을 맡겨 지역구도 타파를 위한 그의 도전에 보상을 해줬다.

노 전 대통령이 당내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선 2002년, DJ는 당내 경선이 끝날 때까지 어느 후보의 손도 들어주지 않았다. 가신그룹인 동교동계는 경선 시작 전까지 당시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높았던 이인제 의원을 지원했지만 경선이 시작된 뒤 '노풍(盧風)'이 불자 중립적인 모양새를 취했다. DJ는 대선의 모든 과정을 지켜보기만 했다. DJ와 가까운 인사는 "중립을 지킨 것"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 측은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던 DJ가 정권 재창출 과제를 놓고 후보들을 끊임없이 저울질했다"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 출범 직후 대북 송금 특검은 DJ와 노 전 대통령의 관계에 결정적인 균열을 낳았다. 대북 송금 특검은 국회에서 한나라당이 통과시킨 것이었다. DJ 측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기대했지만 노 전 대통령은 DJ의 대북정책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면서도 특검을 수용했다. 동교동계의 한 인사는 "당시 김 전 대통령이 받은 충격과 배신감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열린우리당 창당도 두 사람의 관계를 멀어지게 만들었다. 민주당이 DJ가 만든 당이었다면 개혁정치를 표방한 열린우리당은 노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만든 '노무현당'이었다. 당시 민주당에 남은 인사들은 '분당행위'라며 노 전 대통령을 거세게 비난했고 신당에 참여한 인사들은 이들을 '구태정치인'으로 몰아세웠다.

DJ와 노 전 대통령의 화해는 노 전 대통령의 서거와 함께 이뤄졌다. DJ는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평생의 민주화 동지를 잃었다. 민주정권 10년을 같이 해 온 사람으로서 내 몸의 반이 무너지는 심정이다"라고 토로했다.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건강했던 DJ가 건강이 악화돼 병원에 입원한 것도 노 전 대통령 서거에 따른 충격이 있었다는 게 측근들의 설명이다. 한 측근은 "노 전 대통령의 국민장을 치르는 과정에서 몸과 마음이 많이 상했고 충격을 받으셨다"고 말했다.

YS와는 동지와 정적(政敵) 사이를 넘나든 관계였다. 두 사람은 40여 년의 정치인생 동안 민주화 투쟁이라는 한배를 탔지만 정치적으로는 물과 기름 같았다.

두 사람이 직접 대결을 벌인 것은 1968년 신한민주당 원내총무 경선, 1970년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 1987년 대선, 1992년 대선 등 네 차례다.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과 1992년 대선에서는 YS가,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는 DJ가, 1987년 대선 때는 두 사람 모두 패배했다.

특히 1990년 평화민주당을 제외한 '3당 합당'은 DJ로서는 뼈아픈 사건이었다. 3당 합당을 통해 1992년 거대 여당의 대선후보가 된 YS는 14대 대선에서 DJ를 누르고 승리했다. 대선 패배 직후 DJ는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이듬해 영국으로 출국했다.

두 사람은 2007년 대선 때도 부딪쳤다. YS는 이명박, DJ는 정동영 후보를 지지했다. YS는 서청원 친박연대 대표 등 일부 인사를 제외한 과거 민주계 조직을 대거 이명박 후보 선거캠프에 포진토록 했고, DJ는 대선구도를 '한나라당 대 반(反)한나라당' 대결로 만들기 위해 민주당을 비롯한 당시 범여권 세력의 통합을 주문했다.

JP는 DJ가 정권을 잡는 데 결정적이었던 '지역연합론'을 실현시켜준 인물이었다. 박정희 정권에서 탄압을 받았던 DJ가 박정희 정권의 핵심인물이었던 JP와 손을 잡은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하지만 '호남+충청'이라는 이른바 'DJP 연합'은 1997년 대선에서 충청표의 상당수를 DJ에게 줬고 결국 DJ는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DJ는 집권 초 JP를 국무총리에 앉히고 자민련 몫의 장관들을 임명하는 등 JP와의 합의사항을 이행하려 노력했지만 핵심이었던 내각제 개헌은 지키지 않았고 결국 두 사람은 결별했다.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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