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대통령 투신의 재구성

  • 입력 2009년 5월 23일 17시 08분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2009년 5월 23일 오전 5시. 평소와 비슷한 시각 잠자리에서 일어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저 내 서재의 컴퓨터를 켠 뒤 유서를 적어 내려갔다. 최근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은 물론 가족과 측근들에 대한 검찰의 장기 수사로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사흘 전부터는 거의 식사도 거르고 사저 안에서도 집무실에서 칩거한 것으로 알려졌다. 측근들의 위로방문도 받지 않았다. 흡연량도 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부인 권양숙 여사의 검찰 재소환설이 나오면서 정신적 압박은 극에 달한 상태였다.

그는 유서에서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고 털어놨다. 이어 가족을 의식한 듯 "너무 슬퍼하지도 미안해하지도, 원망도 하지마라. 운명이다"고 했다. 검찰 수사로 인한 심리적 압박, 자신을 도와준 주변사람들에 대한 미안함, 현 정권과 검찰에 대한 원망이 뒤섞인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자신의 상징인 도덕성에 상처를 받은 사실이 참기 어려웠던 듯 그는 지난달 22일 자신의 홈페이지 폐쇄를 공지하며 올린 글에서 "더 이상 노무현은 여러분이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아니다. 저를 버리셔야 한다"고 낙담한 심경을 드러냈다. 지난달 30일 대검에서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과 마주쳤을 때도 "나도 그리로 곧 갈 것 같다"며 묘한 뉘앙스의 농담을 던졌다.

오전 5시 21분 유서 작성을 끝낸 노 전 대통령은 경호원 L 씨에게 "뒷산으로 바람을 쐬러 가자"며 가벼운 옷차림으로 사저를 나섰다. 오전 5시 45분경이었다. 검찰 소환조사를 전후해 칩거를 해온데다 언론의 취재경쟁으로 인해 사실상 '연금 상태'에 있던 그로선 실로 오랜만의 산보였다. 노 전 대통령은 경호원과 함께 등산로를 걸었다. 산 들머리의 감나무, 산딸기나무가 최근 내린 비로 인해 싱그러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봉화산 등산로 주변은 숲 가꾸기로 지난해 그가 귀향할 당시에 비해 많이 깨끗해졌다. 경남도유형문화재 40호인 산 중턱의 봉화산 마애불을 지나 걸음을 재촉했다.

봉화산 정상 사자바위는 그가 어린 시절부터 올라가 인근 화포천과 멀리 낙동강 줄기를 바라보며 '호연지기'를 키웠던 곳이다. 맞은 편 야트막한 야산에는 그가 사법고시를 준비할 때 기거했던 움막자리도 있다. 봉화산을 한바퀴 돈 노 전 대통령은 마을 주민들이 '부엉이 바위'로 부르는 곳으로 향했다. 부엉이 바위는 높이가 30m 이상의 깎아지른 절벽으로 '자살 바위'로도 불렸다. 이 곳에서 20여 분 동안 경호원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노 전 대통령은 경호원에게 "담배 있느냐"고 물었다. 경호원이 "가져 올까요" 하자 "가지러 갈 필요는 없다"고 했다. 이어 부근에 등산객이 보이자 나지막한 목소리로 "사람들이 지나 가네"라고 관심을 보였다. 경호원이 등산객 쪽으로 시선을 돌린 사이 노 전 대통령은 몸을 던졌다. 경호원이 저지해 볼 수 없는 눈 깜짝할 사이였다. 오전 6시 40분경이었다.

경호원이 사저 경호팀에게 무전으로 연락해 경호차량으로 7㎞가량 떨어진 김해시 진영읍 세영병원으로 노 전 대통령을 긴급 후송했다. 오전 7시를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바위에 부딪히며 머리를 심하게 다친 노 전 대통령은 의료진의 응급처치에도 상태가 호전되지 않았다. 도착 당시 노 전 대통령은 푸른색 바지에 가벼운 복장이었고 한쪽 발에만 등산화가 신겨져 있었다. 등산화 한 짝과 윗옷은 현장에서 발견됐다. 세영병원 손창배 내과과장은 "노 전 대통령이 의식불명 상태에서 도착했고 머리에 심한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고 말했다. 20여분 동안 머리에 탄력붕대를 감으며 심폐소생술을 했다. 별 효과가 나타나지 않자 외과의사와 간호사, 응급구조사 1명이 동승한 병원구급차는 양산부산대병원으로 내달렸다. 경호원들도 뒤따랐다.

양산부산대병원은 2월 말 노 전 대통령 부부가 건강검진을 받았고 가끔 외래 진료를 했던 곳. 오전 8시 13분 양산부산대병원에 도착한 노 전 대통령을 의료진이 심폐소생술 등을 동원해 회생을 시도했으나 허사였다. 의료진은 오전 8시 반 심폐소생술을 중단했다. 문재인 전 비서실장과 부산대병원장은 오전 11시 "노 전 대통령이 오전 9시 반 서거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63년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느냐"는 그의 유서처럼, 그가 그렇게 관심을 갖고 좋아했던 '자연'으로 돌아간 것이다.

김해=강정훈 기자 manman@donga.com

장윤정 기자 yun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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