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지원 급증

  • 입력 2008년 9월 30일 02시 58분


‘쌀과 핵 무관’ 합의 대포동 발사때 깨져

■ 한반도 정세와 대북지원

햇볕정책을 대북정책 기조로 삼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대북지원 규모는 남북관계 해빙무드, 2차 핵 위기 이후 진행된 6자회담, 서울과 워싱턴의 협력 수준에 영향을 받으며 꾸준히 늘어났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0년 베를린 선언을 통해 대북지원 원칙을 천명하기 전까지는 보수적인 강인덕 씨를 통일부 장관에 임명하는 등 조심스러운 대북정책을 폈다. 당시 대북지원금은 1998년 474억 원, 1999년 566억 원에 그쳤다.

2000년 1차 남북 정상회담 이후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정부의 식량 지원 및 인도적 지원 규모는 늘기 시작했다. 2000년 쌀과 옥수수 50만 t 지원이 합의됐고 2002년에 쌀 40만 t이 제공됐다.

연간 대북지원금이 1조 원을 넘어선 것은 김대중 정부 5년차인 2002년의 일이다. 2000, 2001년에 각각 5877억 원과 6258억 원이 지원됐지만 절반가량이 1994년 제네바 합의 이행에 따라 경수로 건설자금에 쓰였다.

2002년 대통령 선거를 2개월 앞두고 불거진 2차 북한 핵 위기 역시 대북 지원의 속도를 늦추지 못했다.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면서 위기는 고조됐지만 큰 변수는 못됐다.

2003년 이후 계속된 대북 지원은 그해 5월 노무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워싱턴에서 함께 발표한 ‘인도적 지원은 핵 상황과 무관하게 계속한다’는 원칙과 관련돼 있다. 노무현 정부 당국자들은 “쌀과 비료 지원은 굶주리는 북한 주민을 위한 인도적 사업인 만큼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주한미군 감축,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 미군기지 이전 등 진화하는 한미동맹 현안을 놓고 서울과 워싱턴이 물밑 갈등을 빚었던 2004년에는 대북 지원이 다소 주춤했다. 연간 지원액은 1조 원 이하인 8188억 원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북한이 전격적으로 ‘핵 보유 선언’(2005년 2월)을 한 2005년에는 1조4794억 원, 핵실험(2006년 10월)을 한 이후인 2007년에는 1조736억 원이 지원됐다. 안보위기 시점에 대북 지원이 강화된 사례로 꼽힌다.

남북 간 장관급 회담이 1년 반 넘게 중단됐던 2006년엔 지원액이 주춤했다. 당시 통일부 당국자는 29일 “미국이 북한의 위조지폐 제조 유통 및 돈 세탁을 이유로 마카오 소재 방코델타아시아(BDA)은행의 북한 계좌를 동결한 직후 경색된 북-미관계 때문에 북한은 남쪽에도 문을 열지 않았다”고 말했다.

‘쌀 지원은 정치 상황과 무관하다’는 한미 간 합의는 2006년 7월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인 대포동 2호를 시험 발사한 뒤 처음으로 깨졌다. 노무현 정부는 발사 이튿날 “쌀 비료 제공 유보”를 발표했다.

김승련 기자 srkim@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