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해 보더라도 야당 먼저 원칙 지켜라

  • 입력 2008년 6월 2일 02시 57분


김원기 전 국회의장은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야당 의원이 된 후배 정치인들에게 “몸싸움을 하지 말라. 먼저 양보하고, 다음 선거에서 유권자의 선택에 희망을 걸라”고 호소했다. 통합민주당 소속인 김 전 의장은 17대 국회를 끝으로 30년 현역 정치생활을 마감했다. 박경모 기자
김원기 전 국회의장은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야당 의원이 된 후배 정치인들에게 “몸싸움을 하지 말라. 먼저 양보하고, 다음 선거에서 유권자의 선택에 희망을 걸라”고 호소했다. 통합민주당 소속인 김 전 의장은 17대 국회를 끝으로 30년 현역 정치생활을 마감했다. 박경모 기자
■국회개원 60년 헌정 60년

김원기 前 국회의장

::인터뷰=김차수 정치부장

“18대 국회에선 야당이 단상을 점거하거나 물리적으로 의사진행을 방해하지 말아 달라. 경제위기 때 노조가 무파업 선언을 하는 정신으로 대국민선언을 해야 한다. ‘한나라당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우리 야당만 무장해제당할 거다’라고 걱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자기희생이 있어야 국민은 우리를 강한 야당으로 만들어 준다.”

17대 국회의원을 끝으로 30년 정치인생을 마감한 김원기 전 국회의장은 통합민주당 후배들에게 이같이 당부했다.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 민주당사에서 인터뷰한 김 전 의장은 “손해를 보더라도 민주당이 먼저 원칙을 지키라”는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18대 국회가 새로 열리지만, 정치인이 욕먹는 구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정치인 책임이 크다. 우선 정치인이 자신을 장기판의 졸(卒)로 보면 안 된다. 국민이 국회 알기를 우습게 알고 있다. 과거에 정치인은 국가 경영의 주체가 아니었다.”

―정치인도 항변이 있을 것 같다.

“군사독재 시절 대통령 권력은 국회에 ‘매 맞는 역할’을 강요했다. 정치인이 저 모양이니까, 국가경영을 이들에게 맡길 수 없다, 힘 있는 누군가가 나서서 국가를 이끌어야 한다는 인식을 남기려 했다. 그래서 정치인은 ‘욕먹을 자격도 없다’고 나는 말한다.”

―그런 인식을 바꾸려고 노력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아 보인다.

“국회가 과거에는 권력의 시녀였지만, 17대 국회에 와서 비로소 입법부의 위치에 올라설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과거에 의원들은 스스로를 입법의 주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할 필요가 없었다. 17대 국회에서 의원 입법이 전체의 80%에 이를 정도로 변화했다. 하지만 국회 안에서의 몸싸움이 TV에 보도되기만 하면 국민은 눈살 찌푸린다. 17대 국회 동안 정치권 이미지는 더 나빠졌을 것이다.”

―18대 당선자 연수 때 ‘야당 후배들이 먼저 양보하라’고 조언했는데….

“무기력한 야당이란 말을 각오해야 한다. 그래도 양보하라고 했다. 야당은 원칙을 지켜가며 당연한 요구를 해야 한다. 여당이 계속해서 독선 독주를 했다고 생각해 보라. 다음 선거에서 국민은 여당을 심판할 거다. 국민을 믿고, 희망을 걸어달라고 했다.”

―국회 본회의 신상발언을 통해 여당인 한나라당에도 조언을 했는데….

“한나라당은 경제발전에는 역할을 했지만, 민주적 정치발전에 큰 기여를 못한 게 사실이다. 이번(18대 국회)이 좋은 기회라고 했다. 여당의 의석이 어느 때보다 절대다수다. 민주주의 발전은 소수자를 포용하고, 다양성을 존중해야 이뤄진다고 했다. 다수인 한나라당이 오히려 인내심을 갖고 타협하고 협상하면 한나라당은 새로운 정체성으로 태어날 수 있다.”

―평소 정치인의 품위를 강조한 이유는….

“반대를 하더라도 지도자답게 반대해야 한다. 국회에서 벌어지는 싸움판 좀 보라. 여당이건 야당이건, 내가 지도자라는 의식이 없으니까 그런 행동이 나온다. 정치인에 대한 국민 평가가 나쁜 상황이니까 스스로도 자기를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 현상도 있다. 그래서 정치인에게도 나무랄 땐 나무라고, 칭찬할 때는 칭찬하는 문화가 좀 필요하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와 쇠고기 문제 때문에 정국이 혼란스럽다.

“FTA 협상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한 것이다. 노 전 대통령 인기가 없으니까 우리와 관계없는 걸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민주당의 다수임에는 틀림없다. 이런 걸 부인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본다. 한미 FTA는 결국 18대 국회에서 해결될 것이다.”

―출범 100일을 앞둔 이명박 정부를 어떻게 평가하나.

“이명박 대통령의 정치행태에 염려스러운 대목이 많다. 큰 표차로 당선된 것에 대한 자신감 때문인지, 여론과 반대자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기업 경영방식으로 밀어붙이는 게 아닌가 싶다.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쇠고기 문제를 미숙하고 안이하게 처리했다는 증거가 너무 많이 나오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의 정치적 멘터(스승)라는 말을 들었다. 참여정부 5년간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내가 스스로 그렇게 말한 적은 없다. 노 대통령이 나를 존중해 사부니, 스승이니 이런 표현을 썼다. 노 대통령 정권 말기에 국민의 인기가 낮았던 것은 사실이다. 비판도 많았다. 그러나 역사의 평가는 길게 봐야 한다. 박정희 대통령도 사후에 좋은 평가를 받고 있듯이. 노 대통령은 ‘(부정적) 국민 여론이 억울하고, 불합리하다. 보수언론이 만든 거다’라고 생각했다. 분한 마음이 들었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아무리 억울해도 국민 여론은 현존한다. 존재하는 여론에 맞서려고 하지 말고, 존중해야 한다’고 (조언) 했다. 김대중(DJ) 전 대통령 때는 대통령이 주재한 어전회의(청와대 회의)에서 ‘우리끼리 이러지 말고, 야당(한나라당)과 대화하시라’고 강력히 요청했다. 하지만 대통령들을 설득해 내 얘기를 끝까지 관철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개헌을 통한 권력구조 개편에 관심을 보였는데….

“대통령 권력은 통합이 아니라 갈등과 대립의 원천이다. 이게 문제의 출발이다. 국회의 여야 격돌도 헌법구조와 무관치 않다. 대통령은 100% 권력을 차지하니까 사생결단하게 된다. 정당도 유력 대통령 후보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87년 체제’가 20년 넘게 지속됐는데, 사회가 다양해진 21세기 환경에 맞는 헌법구조가 필요하다. 하지만 단기간에 이해당사자의 절충으로 개헌을 시도해서는 안 된다. 오랜 논의와 여과를 거쳐서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개헌을 통한 권력구조 개편은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열쇠이기는 하지만,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아니다.”

○ 김원기 전 국회의장

△1937년 전북 정읍 출생 △1955년 전주고 졸업 △1960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1960∼76년 동아일보 정치부 외신부 사회부 기자 △1976∼79년 동아일보 조사부장 겸 안보통일연구위원 △1979년부터 10, 11, 13, 15, 16, 17대 의원(6선) △1988년 평화민주당 원내총무 △1991년 민주당 사무총장 △1998년 노사정위원회 위원장(장관급) △2002년 노무현대통령후보 정치고문 △2004년 대통령정치특별보좌관 △2004∼2006년 제17대 국회의장

정리=김승련 기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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