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헌절, 무산된 만찬…밥 같이 먹으면 안되는 사람들

  • 입력 2007년 7월 18일 03시 01분


《17일 국회의장 공관에서 개최될 예정이던 제헌절 만찬 회동이 전격 취소됐다. 2004년 김원기 국회의장 때부터 매년 국회의장 주최로 서울 용산구 한남동 의장 공관에서 열린 제헌절 만찬에는 노무현 대통령과 3부 요인, 헌법기관장들이 참석해 왔다. 이번 만찬에도 임채정 국회의장 초청으로 노 대통령과 이용훈 대법원장, 이강국 헌법재판소장, 한덕수 국무총리, 고현철 중앙선거관리위원장 등이 참석 대상이었다. 지난해엔 폭우로 연기돼 8월 29일에 개최되기는 했지만 입법 사법 행정부의 수반과 헌법기관장이 제헌 헌법을 공포한 날 한자리에 모인다는 것 자체가 적지 않은 상징성을 띤다.》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은 17일 오전 11시 50분경 “헌법재판소장과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 (노 대통령이 제기한) 헌법소원의 당사자이자 주무기관이기 때문에 참석을 부담스러워한 것으로 안다”며 “임 의장은 ‘두 분이 빠진 채 대통령을 모시는 것이 결례가 될 것 같다’며 ‘참석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해 대통령이 수용했다”고 설명했다. 이 소장은 16일 오후에, 고 위원장은 17일 오전에 불참 의사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에선 이 소장과 고 위원장의 불참 통보에 대해 ‘대통령에 대한 결례’라며 못마땅해 하는 기류가 감지됐다. 대통령의 일정이 늦어도 1주일 전에 잡힌다는 점에서도 청와대는 당황스러워하는 분위기다. 16일에 나온 세부 일정표에는 ‘5부 요인 만찬’으로 적혀 있다.

하지만 일선 판사들 사이에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적지 않다. 노 대통령은 지난달 21일 중앙선관위가 자신에 대해 ‘선거 중립 의무 위반’이라고 결정을 내리자 헌재에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했다.

따라서 ‘대통령-선관위원장-헌재소장’의 관계가 헌소 사건의 ‘청구인-피청구인-주심재판관’의 성격을 띠게 된 것. 1998년 제정된 ‘법관 윤리강령’ 4조는 ‘법관은 재판 업무상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당사자와 대리인 등 소송 관계인을 법정 외 장소에서 면담하거나 접촉해선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2004년 제헌절 만찬 때도 윤영철 당시 헌재소장은 ‘행정수도 위헌 소송이 계류 중’이라는 이유로 불참했다.

하지만 헌법기관장의 불참이 단순한 소송 관계 때문만은 아니라는 관측도 나온다.

한 중견 판사는 “선거법 위반을 따질 때는 행위의 반복성을 가장 우선적 기준으로 삼는데, 노 대통령은 법 위반을 반복했을 뿐 아니라 소송 기간에 피청구인(중앙선관위)을 압박하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이 헌법소원을 제기한 직후 청와대는 “앞으로 할 말을 일일이 선관위에 질의하겠다”고 했고, 지난달 29일엔 실제로 질의했다. 이달 11일엔 “(앞으로 대통령은) 소신껏 판단해서 발언을 해 나갈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익명을 요구한 법원 관계자는 “노 대통령이 취임 이후 헌법을 비롯한 기존 법질서를 경시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더니 결국 제헌절에 헌법기관 수장들이 함께 밥을 먹을 수도 없는 관계가 됐다”고 개탄했다.

청와대가 만찬 취소를 발표한 직후 노 대통령은 청와대 홈페이지에 헌법과 선거법 등 각종 법을 고쳐야 한다는 내용의 A4 용지 11장짜리 글을 올렸다.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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