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심규선]일본의 비자 면제 뜯어보기

  • 입력 2006년 2월 13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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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한국 에스테’라는 것이 있다. ‘에스테’는 ‘에스테틱’을 줄인 말이니까 ‘한국식 종합미용업소’ 정도로 이해하면 될까? 천만의 말씀이다.

“…최근 수도권에서 꽤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는 것이 한국 에스테이다. 한국 에스테는 한국 여자가 서비스를 해 주는 한국식 마사지라는 선전과 함께 등장했다. 1만 엔 안팎으로 가격이 저렴한 데다 마사지를 받아 몸이 가뿐해지고, 여자의 나긋나긋한 서비스로 기분까지 개운해지기 때문에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일본 유흥업태의 종류와 특징, 규모 등을 시시콜콜히 분석하고 있는 책의 한 대목이다. 이 책은 ‘한국 에스테’는 한국에서 직접 여자 종업원을 데려 오는 것이 특징이라고 소개하고, 앞으로도 이 업종은 인기를 끌 것이라고 전망했다.

별로 즐겁지 못한 얘기를 꺼낸 것은 ‘한국 에스테’가 일본의 비자정책과 결코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 외무성은 일찍부터 한국인에 대한 비자 면제에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법무성과 경찰청이 늘 제동을 걸었다. 비자를 면제해 주면 불법체류자가 늘어날 것이고, 이들 중 상당수가 한국인이 운영하는 유흥업소로 숨어들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한국 에스테’는 그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상징적인 업소였다.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2005년 1월 1일 현재 일본에 불법체류하고 있는 외국인은 20만7299명이고, 이 중 4만3151명(20.8%)이 한국인이다. 단연 1위다. 그 다음인 중국인이나 필리핀인보다 1만 명 이상 많다. 비자 면제를 요구해 온 한국 정부의 아킬레스 힘줄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바뀌고 있다. 최근 들어 한국인 불법체류자는 매년 3000여 명씩 줄고 있다. 일본 정부가 아이치(愛知)박람회의 관람객 유치를 위해 지난해 7개월간 한시적으로 한국인에게 단기비자(90일)를 면제해 줬지만 불법체류자도 늘지 않았다.

지난주 일본 정부는 아예 한국인에 대한 단기비자를 면제한다고 발표했다. 다음 달부터 관광 상용 통과 목적이라면 비자 없이도 최장 90일 동안 일본에 머물 수 있게 된다. 구름 끼고 비만 오던 한일 관계에 모처럼의 희소식이다. 이런 분위기를 경색된 한일 관계를 푸는 계기로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따져 볼 게 있다. 한국은 일본이 외교 관계를 맺고 있는 190개 국가와 지역 중 단기비자 면제를 해 준 62번째 나라다. 선진국 클럽이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30개 회원국 중에서는 29번째다. 당사국인 일본은 빼야 하니까 꼴찌로 면제를 받은 것이다. 지리적 경제적 밀접성을 고려할 때 늦어도 한참 늦은 것이다. 이런 ‘비정상’은 ‘역사적 특수성’이라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일본의 ‘성의’까지 타박할 필요는 없다. 일본의 한 지인은 일본 정부가 한국인 한센병 환자에 대해 보상 결정을 한 뒤 곧바로 비자 면제를 한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2월 22일 시마네 현의 ‘다케시마의 날’과 한국의 3·1절을 앞둔 시점에서 한국 측에 보내는 화해 시그널이라는 얘기도 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로 인한 한국인의 불만을 다독거리려는 의도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국가 간 비자 면제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일 뿐이다. 서로의 존재 가치와 필요성을 인정하도록 만드는 게 교류 확대의 목적이다. 누구도 한국과 일본이 쉽사리 친해질 것이라고는 장담하지 못한다. 그러나 누구도 두 나라가 친해질 수 있는 가능성까지 봉쇄할 순 없다. 비자 면제는 그런 가능성을 키우기 위한 무대 만들기다. 그 무대에서 어떤 퍼포먼스를 할지는 두 나라가 지금부터 고민해야 한다. 양국 관계는 비자를 면제한 경위만큼이나 앞으로도 당분간은 특수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자 면제가 됐다고 해서 마냥 박수만 칠 수 없는 이유다.

심규선 편집국 부국장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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