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청정보 이용한 김현철씨도 도청당해

  • 입력 2005년 12월 15일 03시 03분


김영삼(金泳三) 정부 시절 국가안전기획부는 대통령과 정권 실세의 정보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각계 주요 인사를 광범위하게 도청한 것으로 드러났다.

김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賢哲) 씨가 문민 정부 당시 막강한 권력을 누린 배경에는 안기부의 도청 정보가 있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또 김대중(金大中)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은 고성능 휴대전화 감청 장비를 개발해 주요 인사 1800여 명을 24시간 도청했다.

▽현철 씨는 도청의 수혜자이자 피해자=안기부 비밀 도청 조직인 미림팀은 매달 1000만 원을 ‘특수 망비’ 명목으로 지급받아 도청에 협조하는 망원(정보수집원) 1인당 20만∼70만 원을 지급했다. 도청 대상자를 자체적으로 선정한 미림팀은 유선전화 감청 부서인 과학보안국에서 도청 자료를 넘겨받아 대상자를 선정하기도 했다.

검찰이 전 미림팀장 공운영(孔運泳·구속 기소) 씨의 집에서 압수한 도청 테이프 274개와 녹취록 13권에 나타난 도청 건수는 총 554회. 도청 피해자 가운데는 정치인이 273명으로 가장 많았고, 고위 공무원 84명, 언론계 인사 75명, 재계 57명, 법조계 27명, 학계 26명, 기타 104명 등이었다.

안기부는 여야 정치인, 국무총리 등 고위 공직자, 군 참모총장 등을 주로 도청했으며, 한때 현철 씨도 도청한 것으로 드러났다. 현철 씨는 도청 정보를 이용한 수혜자였지만 그 자신도 도청의 피해자였던 셈이다.

현철 씨는 김기섭(金己燮) 전 안기부 운영차장에게서 미림팀 보고서를 받거나 오정소(吳正昭) 전 안기부 국내담당 차장에게서 구두로 도청 정보를 보고 받았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안기부장의 주례 보고서를 통해 도청 정보를 접했다.

현철 씨와 이원종(李源宗) 전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이 도청 정보를 정치에 이용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 전 수석은 1996년 이회창(李會昌) 씨 지지세력 확충을 위한 모임의 대화 내용을 도청한 보고서를 받은 뒤 한 의원에게 “벌써 움직이면 어떻게 하느냐”고 말한 적이 있다.

안기부는 유선전화를 광범위하게 도청했으며, 권영해(權寧海) 전 안기부장과 오 전 차장도 주요 인사에 대한 통신첩보를 매일 보고받은 사실을 인정했다.

▽DJ 시절 국정원, 첨단 장비로 도청=국정원은 “휴대전화는 도청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국민의 믿음을 역이용해 국민을 도청했다. 유선중계통신망을 이용한 휴대전화 감청 장비(R2)와 이동식 휴대전화 감청 장비(CAS·카스) 등 한 번에 최대 3600회선을 도청할 수 있는 장비를 개발해 도청에 활용했다.

국정원은 R2에 주요 인사 1800여 명의 휴대전화 번호를 입력해 놓고 24시간 이들의 통화를 도청했다. 주요 인사 1800여 명은 정치인(55%), 언론인(15%), 경제인(15%), 고위 공직자(5%), 시민사회단체 간부(5%), 노조간부(5%) 등이었다.

국정원 도청에 주도적으로 개입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임동원(林東源), 신건(辛建) 전 국정원장은 감청 장비 개발에도 개입했으며, 도청 정보를 매일 보고받은 것은 물론 도청을 지시하거나 독려한 사실도 드러났다고 검찰은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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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훈 기자 jefflee@donga.com

▼삼성 97년 대선자금 제공의혹 “증거없음”▼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의 도청 테이프인 이른바 ‘X파일’에 담긴 삼성그룹의 1997년 대선 자금 제공 의혹에 대해 검찰이 무혐의 처분을 내린 것은 여러 가지 현실적 한계에 따른 고육책으로 보인다.

검찰이 X파일에 등장하는 삼성그룹 대선자금 제공 의혹 관련자들에 대해 모두 무혐의 처분을 하면서 내세운 주된 근거는 ‘증거 불충분’이었다.

당초 참여연대는 삼성 이건희(李健熙) 회장, 홍석현(洪錫炫) 전 주미대사 등과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등을 각각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과 뇌물 공여, 뇌물 수수 등 혐의로 고발했다.

그러나 8년가량 시간이 흘러 증거를 찾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삼성 관계자의 진술을 확보하는 것도 어려운 상황에서 고발 내용을 입증할 자료를 삼성이 아직까지 남겨 놓았을 리도 없었다.

설령 삼성이 여야 정치권에 대선자금을 건넸다는 게 사실로 밝혀져도 이 자금의 대가성이 입증되지 않는 한 뇌물죄를 적용해 처벌할 수 없다. 고발 혐의와 무관하게 정치자금법 위반 여부를 따져볼 수 있으나 정치자금법이 개정된 것은 1997년 11월 14일. X파일에 나오는 내용 중 상당 부분은 이 법 개정 이전에 발생한 데다 그나마 정치자금법은 공소시효가 3년에 불과하다.

불법 수집된 자료를 토대로 수사를 할 수 있느냐는 본질적인 한계도 작용했다.

그러나 이 같은 현실적 법적 한계를 떠나 검찰이 처음부터 삼성 수사에 소극적인 입장을 가졌던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된다.

조용우 기자 woogij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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