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포로 딸 탈북자 ‘머나먼 한국’

  • 입력 2005년 10월 20일 03시 08분


코멘트

《국군포로의 딸이 천신만고 끝에 탈북에 성공했지만 남한에 있는 친지들의 변심과 암 선고로 생사의 기로에 섰다. 납북자가족모임 최성용(崔成龍·53) 대표는 19일 “국군포로 이헌우(李憲雨) 중위의 딸 이모(48) 씨가 함께 탈북하려 했던 아버지가 숨지자 남한에 있는 친지들이 변심해 한국에 입국하지 못하고 북송 위험에 처해 있다”고 밝혔다. 현재 중국 옌지(延吉) 시에 머물고 있는 이 씨는 자궁암 판정을 받아 당장 수술을 받지 못하면 생명이 위험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어서라도 가야지”=1951년 1월 간부후보생 출신 소위로 입대한 이헌우 씨는 7월 수도사단 1연대 부관장교로 근무하던 중 백마고지 전투에서 포로가 됐다. 그는 전사자로 처리돼 중위로 1계급 특진됐으며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묘지에는 위패까지 있다. 군번은 24830.

장교 출신 국군포로 10여 명과 함께 함경북도 새별군 고건원탄광에서 강제노역을 한 이 씨는 1957년 김모(1999년 사망) 씨와 결혼해 딸 이 씨를 낳았다.

딸 이 씨는 1999년 어머니와 남편을 탄광사고로 잃자 탈북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서울 동작구 국립묘지에 안치된 이헌우 씨의 위패. 김미옥 기자

이 씨는 북한 당국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올해 7월 남한에 있는 삼촌들과 연락할 수 있었다. 중국에서 활동하는 탈북 중개인의 연락을 받은 이헌우 씨의 동생이 편지를 보낸 것. 하지만 국군포로 이 씨는 환갑이 넘도록 이어진 고된 탄광노동에 시달리다 올 3월 뇌중풍으로 이미 반신불수가 된 상태였다.

동생의 편지를 받아 든 이 씨는 “기어서라도 두만강을 넘겠다”며 귀향의 의지를 불태웠지만 편지를 받은 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8월 12일 숨을 거뒀다.

▽머나먼 한국행=이헌우 씨 사망 소식을 들은 남한 친지들은 딸 이 씨에게 유해를 수습해 탈북하라고 권유했다.

이 씨는 아들 최모(26) 씨의 반대로 쉽사리 탈북을 결정하지 못했다.

“고향에 가서 형제들이 잘 살고 있는지 살펴보라”는 아버지의 유언과 아들의 반대 사이에서 고민하던 이 씨는 하나뿐인 혈육을 북한에 남겨 두고 지난달 29일 두만강을 넘었다.

그의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아버지의 시신과 함께 북한을 탈출할 수 없었던 그에게 한국 친지들이 “유골을 가져오지 않아 가족 관계를 확인할 수 없다”며 연락을 끊은 것.

국군포로 가족의 입국은 남한 측 가족의 신원보증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한국행이 어렵게 된 이 씨는 갑작스러운 복통을 느껴 찾은 중국의 한 병원에서 자궁암 판정을 받았다.

▽“어차피 오래 살지 못할 목숨”=이 씨는 19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포로의 딸로 북한에서 최하층 삶을 살아왔는데 남한의 피붙이마저 외면하니 죽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며 “어차피 오래 살지 못할 목숨인데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지 못할 것 같아 죄송할 뿐”이라며 울먹였다.

그는 “아버지의 유언은 ‘나를 대신해 고향에 가 달라는 것’과 ‘통일이 되면 유골을 고향에 묻어 달라는 것’이었다”면서 “동생의 편지를 받고 뇌중풍으로 비뚤어진 입을 힘겹게 떼며 ‘남한에 가자’던 아버지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며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씨의 소식을 들은 납북자가족모임 최 대표는 15일 정부에 낸 탄원서에서 “남한은 비전향 장기수의 시신까지 북한으로 보내고 있는데 죽을 위기에 놓인 국군포로의 딸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이는 국가로서 책무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국방부의 한 관계자는 “최 대표가 이 씨의 신원을 보증한다는 조건 아래 이 씨가 빨리 한국에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고 밝혔다.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