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자회담 이후]<1>한반도 역학관계

  • 입력 2005년 9월 20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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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발표된 베이징 공동성명은 북한 핵 문제 해결의 한 단계 진전으로 볼 수 있다. 포괄적인 원칙들에 합의했을 뿐이라는 점에서 ‘스타트라인’을 막 넘어선 것에 불과하다는 시각도 여전히 존재한다. 북핵 해법을 구체화하는 밑그림을 그리는 데는 아직 멀고 험난한 여정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과 미국 일본 3국이 북한과의 관계를 정상화해 동북아시아의 항구적 평화체제를 만들어 가려면 해결해야 할 난제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복잡한 역학관계는 물론 오랜 역사적 불행에서 비롯된 불신과 의혹…. 동북아 평화체제라는 대장정의 첫발을 내디딘 남북, 북-미, 북-일 간 삼각 축의 앞날을 조망해 본다.》

▼北-美, 인권 문제 등이 관계 정상화 변수▼

19일의 ‘베이징 합의’는 멀고 험난할 북-미 관계 정상화 여정의 첫걸음으로 풀이된다. 미국은 핵 포기의 최종적 대가로 북-미 관계 정상화와 함께 정전협정을 평화체제로 바꾸는 작업도 하겠다는 구상을 이미 공개한 바 있다.

그러나 북-미 관계의 앞길에는 수많은 돌발 장애요소가 잠복해 있다.

양국은 이미 1994년 북-미 간 제네바 기본 합의문에 △합의 3개월 내에 통신 금융거래 및 무역 투자제한을 완화하고 △양국 관계를 대사급으로 격상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그러나 이후 기본 합의문 후속 의정서의 합의가 미뤄지고 1998년 북한의 미사일 실험과 금창리 핵시설 의혹이 불거지면서 관계 정상화는 한 발짝도 내딛지 못했다. 빌 클린턴 행정부 말기 북-미 관계 정상화를 이루려던 시도도 있었으나 미국의 정권 교체로 이 논의는 ‘없던 일’이 돼 버렸다. 또 이번 합의문에서는 2차 북한 핵 위기를 촉발했던 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 문제가 명시되지 않았다. 향후 북한 핵시설에서 진행될 ‘폐기 검증 작업’ 때까지 HEU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면 베이징 합의가 원점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무엇보다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북한과 핵 문제는 협상하되, 인권 문제는 타협하지 않는다’는 두 갈래 대북 정책을 세워 놓고 있다. 특히 인권과 민주주의 신장을 통해 북한의 ‘체제 변형’을 도모하겠다는 미국의 정책은 향후 협상 과정의 기류를 바꿔 놓을 수 있는 핵심 요인이다.

더구나 워싱턴의 분위기로 볼 때 미국의 북한 인권 정책은 3년 뒤 부시 행정부가 물러나더라도 달라질 가능성이 크지 않다. 최소 5∼10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 북-미 관계 정상화 여부는 핵 문제뿐 아니라 북한의 체제 변화에도 달려 있다.

워싱턴=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南-北, 교류-화해 최대 장애물 일단 제거▼

아직은 ‘문건상의 약속’이지만 북한이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 계획을 포기하겠다는 의지를 밝힘으로써 남북관계는 2000년 6월 정상회담 직후를 능가하는 ‘신(新)르네상스’ 시대를 맞게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일각에서는 제2차 남북 정상회담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6자회담을 통한 북한 핵 문제 해결과 남북 장관급회담을 통한 남북 간 긴장 완화 및 교류 협력을 동시에 진행해 나갈 수 있는 이른바 ‘트윈(twin) 엔진’을 마련한 셈이다.

특히 남북이 한반도 평화체제 구상의 당사자가 된다는 점을 천명한 것은 전면적인 남북교류 협력 실현의 최대 장애물 중 하나를 제거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물론 신중론도 있다. 긍정적인 환경이 조성됐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남북관계의 진전은 북한의 체제유지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획기적 진전을 점치는 것은 성급하다고 일부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하태원 기자 taewon_ha@donga.com

▼北-日, 국교정상화 협상 양측 모두 적극적▼

일본인 납치문제로 교착 상태에 빠져 있던 북-일 국교정상화 논의도 본 궤도에 오를 전망이다.

북한 측 수석대표인 김계관(金桂寬) 외무성 부상은 18일 사사에 겐이치로(佐佐江賢一郞)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과 개별 회동을 갖고 “북-일 대화 재개를 위해 더욱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일본 외무성 관계자는 “(납치 문제에) 노력하는 자세를 느끼게 하는 발언이었다”고 평가했다.

일본 언론들은 북한을 두 차례 방문하면서 북-일 국교정상화에 의욕을 보여 온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가 중의원 선거에서 압승해 집권 기반을 더욱 강화하자 북한도 ‘고이즈미 정권 때 수교를 마무리 짓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고이즈미 총리도 선거 직후 대북 경제제재 문제에 대해 “압력과 대화를 병행하면서 전체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며 신중론을 견지했다.

일본 외무성은 19일 발표한 성명에서 “일본은 동북아 평화와 안정이라는 공동목표 달성을 위해 관계국과 긴밀히 협력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도쿄=박원재 특파원 parkwj@donga.com

▼6자회담 주역들▼

“의장국인 중국의 기여가 결정적이었다. 중국은 고도의 중재안과 4차 수정안까지 내놓으면서 성의를 다했다.”

북한 핵 관련 6자회담 상황을 시시각각 보고받은 정동영(鄭東泳)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 겸 통일부 장관이 19일 6자회담 합의문 발표 직후 기자회견을 통해 밝힌 내용이다. 우다웨이(武大偉) 중국 외교부 부부장의 노력이 그만큼 컸다는 얘기다.

우 부부장은 수정안을 놓고 6자회담 참가자가 중구난방으로 입장을 밝히면 “그것은 6자회담에서 논의할 게 아니다”며 말을 끊었다. 회담 막판에 북-미를 압박하기 위해 공동성명 최종안을 대표단 책상 위에 올려놓고 기자들에게 전체회의를 공개하는 과감한 전술을 구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최고의 주역은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평가다. 우리 정부 고위관계자는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힐 차관보야말로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가 있을 때 북한은 6자회담 합의문에 도장을 찍는 게 유리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힐 차관보는 1단계 4차 6자회담 첫 전체회의 기조연설에서 김정일(金正日) 북한 국방위원장을 ‘체어맨’이라고 지칭하는 등 북한을 배려했다. 그 이전 미국 고위 관계자들의 김 위원장에 대한 호칭은 ‘미스터’가 최고였다.

힐 차관보는 1, 2단계 회담까지 합해 3주가 넘는 회담기간에 매일 저녁마다 호텔에서 그날의 상황과 전망을 솔직하게 공개했다. ‘오늘은 경수로의 날, 그러나 경수로 주간이 돼선 곤란’ 등 압축적인 표현으로 상황을 깔끔히 정리하는 수사까지 보여주었다. 이 때문에 힐 차관보가 숙소인 중국대반점으로 돌아올 시간이면 100명에 가까운 기자들이 모여들곤 했다.

한국 수석대표인 송민순(宋旻淳) 외교통상부 차관보도 빼놓을 수 없는 수훈감이다. 그는 특히 위기상황에서 중재력을 발휘했다. 7월 4일 미국이 더는 북한과 양자회담을 하지 않겠다고 밝혀 1단계 4차 6자회담이 위기로 치닫자 송 차관보는 남-북-미 3자회동을 성사시키며 파국을 면하게 하기도 했다.

북한 측 수석대표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은 이번 회담에서 이전과는 다른 ‘부드러운’ 면모를 보였다. 미국이 강경한 입장을 밝힐 때마다 언론을 통해 맞비난했던 과거와 달리 이번에는 대미 비난을 자제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는 데 주력했다. 현학봉 북측 대표단 대변인을 내세워 15, 16일 연이어 기자회견을 열 때는 전례 없이 1시간 전에 언론사 기자들에게 이를 통보해 주는 친절함을 보이기도 했다.

박형준 기자 love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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