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84]석학들에게 듣는 ‘2004 한국’

  • 입력 2004년 3월 31일 19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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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정국’과 총선으로 이념 세대 계층간의 갈등이 더욱 첨예해지면서 오늘날 한국 사회는 큰 혼란에 빠져 있다. 현 상황이 위기인지, 아니면 역사발전의 과도기인지에 대한 인식차도 크다. 본보는 창간 84주년을 맞아 ‘다시 나라를 생각하자’를 주제로 우리의 현실을 진단하면서 앞으로의 발전방향을 모색하는 특집 좌담을 마련했다. 본보 객원대기자인 최정호(崔禎鎬) 울산대 석좌교수의 사회로 이만열(李萬烈)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과 송호근(宋虎根)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가 이야기를 나눴다.》

▽최정호=동아일보가 창간 84년을 맞았다는 것은 독자로서나 국민으로서나 다행스럽고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유럽에서도 신문의 연륜이 이처럼 오래된 경우는 드뭅니다. 동아일보가 창간 84년 기념 어젠다로 내건 표제가 ‘다시 나라를 생각하자’입니다. 만약 오늘날 한국이 위기에 처해 있다면 그 위기가 어디서 왔고,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분석해야겠지요. 이만열 위원장께서는 큰 시간적 맥락에서, 송호근 교수는 수평적 맥락에서 이를 진단해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만열=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19세기 말부터 21세기로 이어져 오는 민족사의 험난한 장정을 되돌아볼 때 현재를 심각한 위기의 시대, 혼돈의 시대로 보는 것에는 유보적 입장입니다. 과거를 ‘3김(金) 시대’로 요약한다면 현재의 위기의식은 그런 ‘3김 시대’에서 ‘탈권위 시대’로 이동하며 종래의 권력구조가 허물어지는 데서 오는 허탈감이 작용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최=우리가 겪고 있는 갈등에 과거와 다른 무엇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과거에는 갈등 속에서도 어떤 연속성이 있었는데 2002년 대통령선거를 겪으면서 그 연속성이 깨진 것이 아닌가 합니다.

▽송호근=위기 상황이 아니라는 진단에 동의합니다. 위기는 아니지만 혼란된 상황이란 점은 맞습니다. 사회적 불안감이 확산되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은 다른 이유에 있습니다. 한국사회가 점차 다중적 정체성을 확인해 가고 있는 데다 ‘3김 시대’의 카리스마 정치가 퇴장한 정치적 공백에 새로운 리더십이 등장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1987년의 민주화 이후 우리 정치의 ‘변신 시간’이 지체된 점도 현재의 상황이 빚어진 원인입니다.

▽최=경제성장과 정치발전의 상관관계는 분명 존재하지만 한국 현대사에는 그런 것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특수체험이 있습니다. 오늘의 갈등이 2030세대와 5060세대간의 인식의 단절에 있다면 그것은 6·25전쟁과 5·18광주민주화운동이란 역사 체험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난 대선은 기성세대에게 엄청난 충격을 줬습니다. 기성세대는 비주류로 간주된 세력이 돌연 주류로 등장한 것을 소화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이=세대간 갈등은 아날로그 세대와 디지털 세대 사이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과학기술의 변화에 따르지 못하는 5060세대의 두려움이 위기감으로 바뀐 것이 아닌가 싶어요. 2002년 대선에서 젊은 세대는 인터넷과 휴대전화로 이겼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승리한 쪽이 과학기술 발전뿐 아니라 거기에 대한 책임까지 질 수 있느냐는 데 의문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지금 많이 양산되고 있는 신용불량자 문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적어도 5060세대는 자기 가족이나 직장에 대해 아주 책임 있는 자세를 지켜 왔어요.

▽송=한국에서 ‘세대’가 변동의 추진력으로 등장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세대 열망이 종교, 계급, 이데올로기, 전통적 도덕성 같은 여과 기제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현실정치와 접목됐기 때문입니다. 둘째, 대안은 보통 이념적 산물인데 한국에서 이념은 전쟁을 통해 몸에 각인되고 기억 속에 깊이 체화돼 사생결단의 투쟁을 낳았어요. 이제는 논리적 우월성보다 성과 중심의 실용적 관점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최=지금은 광복 후 6·25전쟁 때까지의 좌우 격돌에 비하면 모든 여건이 좋습니다. 6·25전쟁 때는 중학생까지 좌우로 갈라져 인민군 점령 3개월 후 우리 반 학생의 3분의 1이 죽었어요. 그에 비해 오늘날 386세대는 복 받은 세대입니다. 1989년 공산권의 총체적 붕괴로 육체적 고통 없이 심정적 전향이 가능했기 때문이죠. 반면 5·18에 대해선 기성세대의 인식이 너무 피상적이고 안일했습니다. 내가 당시 20대였다면 나도 386세대처럼 했을 것입니다. 국토에서 국군이 국민을 대량 학살하던 현실에서 어떻게 국가를 조국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386세대가 이쪽 독재자를 피해 다른 독재자를 곁눈질한 것은 잘못이었어요.

▽이=386세대가 6·25를 겪은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나 6·25세대가 5·18에서 386세대가 겪은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나 모두 자기 개방을 통해 상대방에게 접근하려는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지요. 19세기 말 위정척사파, 개화파, 민중세력만 봐도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계속 매도했습니다. 위정척사파는 개화파를 ‘나라 팔아먹는 사람, 금수 같은 자’들로 바라봤고, 개화파는 위정척사파를 고리타분하고 폐쇄적 인물로 봤을 뿐 서로의 고민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주관적으로는 애국 애족한다고 했지만 객관적으로는 나라를 위한 일에 힘이 결집되지 못했어요.

▽송=저는 386세대가 적어도 5년 후에는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이나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50대 초반으로 70년대 학번입니다. 소극적이지만 자기 성찰적인 70년대 학번은 386세대의 강한 실천과 변혁지향성을 관리해 주는 ‘관리형 지도자’가 될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정당제도가 기성세대와 386세대의 충돌, 보혁 갈등을 담아내는 그릇이 못 되었어요. 이런 대표성(representation)의 위기가 ‘거리정치’를 낳고, 이념의 전면 대치를 낳았다고 봅니다. 결국 50대 초반들이 펼칠 관리의 정치가 풀어내야 할 정치적 과제는 이런 ‘이해 대변’을 제대로 해낼 수 있는 정당을 등장시키는 것입니다.

▽최=정당정치의 성숙을 기대한다는 것은 필요하지만 인내를 갖고 기다려야 할 요원한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언론매체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언론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계도’가 돼야 합니다. 편 가르기 대신 통합적 사회로 이끌어야겠죠. 특히 과거 반민주에 대항해 민주화를 크게 부르짖었던 동아일보처럼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신문이 이런 통합과 치유에 앞장서야 합니다.

▽송=초기 민주화 과정에서 언론은 사회의 닫힌 곳을 열어젖히고 감춰진 곳을 드러내며 긍정적 역할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시민의 취향과 비전이 급속도로 변해가는 상황에서 언론이 이념의 각축전에서 갈등을 부추김으로써 이젠 사회 발전의 정체요소가 되고 있어요. 한국에선 전통적으로 실용주의에 대한 배척이 심한데 이젠 원칙보다 성과를 중시해야 합니다. 언론은 원칙과 논리적 우월성에 매달리기보다 성과가 훨씬 중요하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합니다.

▽최=새로운 언론 수단이 나올 때마다 사회적 변혁을 가져왔습니다. TV매체가 케네디를 당선시켰고, 비디오가 호메이니의 혁명을 가능케 했으며, 노무현 정부는 인터넷 매체의 산물입니다. 독일에서 히틀러가 집권한 결정적 요인도 1930년대 초 독일의 대자본이 소유한 라디오매체를 히틀러에게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히틀러와 노무현의 집권이 다른 것은 라디오가 일방 매체였다면 인터넷은 쌍방 매체란 점이겠지요. 인터넷 정치는 고대 아테네의 에클레시아(민회)처럼 누구나 발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직접 민주주의적 현상입니다. 이럴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언변입니다. 이런 말재주가 강조되면서 등장한 것이 소피스트지요. 그러나 이들에겐 논리나 공정성이 없었어요. 따라서 기성 신문이 해야 할 일은 소피스트의 문제를 비판했던 소크라테스의 역할입니다. 활자매체로서 신문의 역할은 감성의 시대에 이성을 수호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리=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최정호(崔禎鎬) 동아일보 객원대기자▼

△1933년생 △독일 베를린자유대 철학박사 △한국일보 기자, 베를린특파원, 논설위원

△성균관대·연세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울산대 석좌교수(현)

▼이만열(李萬烈)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1938년생 △서울대 문학박사 △숙명여대 사학과 교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 △고구려연구재단 이사(현)

▼송호근(宋虎根)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1956년생 △미국 하버드대 사회학박사 △하버드-옌칭 연구소 연구원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소장(현)


창간특집 좌담 참석자들은 “현재의 사회적 분열상이 과거의 갈등구조와 다른 새로운 형태인 것은 분명하지만 극복하지 못할 위기라기보다는 사회발전을 위한 과도기적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왼쪽부터 이만열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최정호 본보 객원대기자,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전영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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