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와 세계]북한 생산 부진속 인플레 '자본주의 쓴맛'

  • 입력 2003년 6월 19일 19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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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평양시에 세워진 종합시장. 수요와 공급에 따라 가격이 변한다.-사진제공 조선신보 조선중앙통신
최근 평양시에 세워진 종합시장. 수요와 공급에 따라 가격이 변한다.-사진제공 조선신보 조선중앙통신
《북한은 2002년 7월 1일 임금과 물가를 크게 인상하고 공장과 기업소(기업)의 자율권을 강화하는 것을 중심으로 하는 ‘7·1 경제관리 개선조치’를 단행했다. ‘고난의 행군’ 시절 무너진 국가계획경제를 복원하고 생산을 늘리려는 이 조치는 신의주 경제특구 지정과 같은 대담한 대외 개방조치와 함께 진행됐다. 그 후 1년이 흘렀다. 핵 개발 논란 등 대외 경제 여건이 날로 악화되는 가운데 북한 당국은 과연 의도한 목적을 달성했을까.》

“지난해의 경제사업은 강성대국 건설의 진격로를 열어놓았다.”(북한 국가계획위원회 최홍규 국장, 총련 기관지인 조선신보와의 4월 1일자 인터뷰에서)

“하루가 다르게 물가가 오른다. 배급은 줄었는데 노임을 못 받는 노동자가 많다.”(북한 주민 변재철씨, 사단법인 북한민주화네트워크와의 4월 9일자 인터뷰에서)


새로운 경제정책에는 성과와 부작용이 따르게 마련이다. 북한의 7·1 경제관리 개선조치도 마찬가지다. 주민과 기업의 근로 및 생산 의욕이 높아졌지만 물가가 크게 오르는 등 거시경제가 불안하다.

▽노동의욕과 기업 자율성은 커져=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북한의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전년보다 1.2% 성장해 1999년 이후 4년째 플러스 성장을 이어갔다.

한국은행은 “7·1 경제관리 개선조치로 주민들의 노동의욕이 향상돼 노동집약적인 농림어업과 경공업, 상업 부분 유통이 활성화됐다”고 평가했다.

기상여건이 좋아 쌀 생산 등 농림어업 생산이 4.2% 성장했고 식료품 의류 등 주민 생필품을 생산하는 경공업이 2.7% 성장했다. 도시와 농촌 곳곳에 간이 ‘매대(판매 시설)’가 설치되는 등 상업유통이 활성화되면서 도소매업이 6.5% 성장했다. 운수업도 3.8% 성장했다. 국가계획위원회 최 국장은 “지난해 전국적으로 2907개의 공장, 기업소가 인민경제계획을 달성해 공업 총 생산액은 2001년보다 112% 늘어났다”고 주장했다.

남성욱 고려대 교수는 “무엇보다 북한 주민들이 경쟁과 인센티브 등 자본주의의 작동원리를 배우고 경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소득”이라고 말했다.

▽부진한 생산, 치솟는 물가=이에 비해 경제 성장의 기초가 되는 광업 중화학공업 에너지산업의 성장률은 각각 ―3.8%, ―4.2%, ―3.8%를 나타냈다. 에너지와 기계 원자재 등의 부족은 산업 전반의 위축을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더 많이 생산하면 더 많은 월급을 준다고 약속했지만 에너지와 자재가 부족해 제대로 생산하지 못하는 공장과 기업소도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함경북도 무산에 살고 있는 변씨는 “지난해 9, 10월까지는 그래도 월급을 제대로 주더니 11월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고 올해에 들어서는 노임을 받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변씨는 현재 몰래 국경을 넘나들며 밀무역을 해 생활하고 있다. 어구공장에서 일했다는 탈북자 김영덕씨(가명·36)도 “지난해 7월 공장에서 선불로 2000원의 임금을 받았지만 이후 공장이 돌아가지 않아 임금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증언했다.(탈북자동지회보 3월호)

이처럼 당국의 의도대로 생산이 늘지 않은 상태에서 임금 인상으로 돈이 많이 풀리면서 인플레이션이 두드러지고 있는 것.

북한민주화네트워크가 4월 이후 중국으로 넘어온 탈북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지난해 7월 국정가격이 44원으로 올랐던 쌀 1kg은 현재 농민시장과 장마당에서 180(함경남도 단천시)∼250원(함경북도 청진시)에 거래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암시장 환율도 급등했다. 1달러의 공식 환율은 150원이지만 600∼700원선에 거래되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일부 지역에서 1000원에 거래된다는 첩보도 있다”고 말했다.

남 교수는 그러나 “물가가 오른다는 것은 국가가 억눌렀던 가격이 수요와 공급에 따라 변한다는 것이어서 오히려 바람직한 현상으로 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양문수 경남대 북한대학원 교수는 “탈북자 대부분이 함경북도 등 국경지역 출신이어서 증언의 한계가 있을 수 있다”며 “평양 등 중심지와 중요 공장에서는 생산과 임금지급이 제대로 되는 곳도 많을 수 있다”고 말했다.

▽농민시장 단속에서 종합시장 허용까지=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지난해 7월 개선조치 실시와 함께 강력한 규제를 폈던 농민시장을 ‘종합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양성화한 것은 앞으로 북한의 시장도입 가능성과 관련해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10일 “올 들어 회계법이 채택되고 농민시장도 종합적인 소비품 시장으로 확대됐다”며 “토산물뿐만 아니라 공업품까지 사고 팔 수 있는 이러한 종합시장이 북한 전역에 조성되고 있다”고 전했다. 또 “북한은 시장 운영에 관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외국으로부터 최대한의 협조를 구할 계획”이라며 이례적으로 “당국이 경제개혁을 추진해왔다”는 표현도 사용했다.

통일부 정보분석국은 “농민시장을 국가가 적극 관리해 급증하는 수요를 충족시키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신석호기자 kyle@donga.com

▼신의주 특구·개성공단 상태 ▼

북한이 대외개방의 기치를 내걸고 추진해 온 신의주 특구 및 개성공단 사업은 현재 앞날을 점치기 어려운 상태에 있다.

‘북한속의 홍콩’을 표방하던 신의주 특구는 지난해 9월 24일 초대장관으로 임명됐던 어우야(歐亞)그룹 양빈(楊斌) 회장이 불과 2개월 만인 11월 27일 중국 당국에 전격 구속되면서 사실상 중단됐다. 북한이 야심적으로 제시한 ‘입법·사법·행정권 보장, 무관세 및 소득세 14% 적용, 별도 화폐사용’ 등 특구의 장밋빛 구상도 물거품이 될 처지다.

통일부 관계자는 “양 회장 구속 이후 북한 신문과 방송에 신의주 관련 뉴스가 사라지다시피 했다”고 말했다. 홍콩 언론은 15일 양 회장의 후임자가 내정은 됐지만 공개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보도했다.

개성지역 2000만평을 공업단지로 조성하는 개성공단 사업은 이달 30일 착공식을 갖기로 남북양측이 잠정합의했다. 착공식이 끝나면 곧바로 토지공사와 현대아산이 주도하는 1단계 100만평 공단조성 작업이 시작될 예정이다.

그러나 북한 당국이 실제로 개발 의지를 갖고 있는지는 불확실하다. 통일연구원 임강택(林崗澤) 경제협력실장은 “착공식은 미국 등 국제사회에 북한이 ‘핵개발 사태의 와중에도 개방의지를 갖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성격이 강하다”고 분석했다.

신의주와 개성은 각각 중국자본과 한국자본을 겨냥한 것으로 금강산관광지구, 나진·선봉 무역지대와 함께 경제회생을 노린 동서남북 4개 방향 프로젝트의 일부였다.

이 중 개성공단은 서울에서 가깝고 숙련 노동력(1인당 월 80∼100달러)을 활용할 수 있어 국내기업의 주목을 받았으나 지난해 10월 북핵 사태가 불거진 이후 투자논의가 중단됐다. 이 때문에 공단 토지 및 건물의 임대료 산정, 현찰 지불 여부 등에 관한 협상도 교착상태에 빠져있다.

김승련기자 srkim@donga.com

▼北 7·1 경제개선 조치란 ▼

김일성종합대학 교수 출신인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조명철 박사는 “7·1 경제관리 개선조치는 북한 역사에서 가장 실질적인 경제 개선 조치”라고 평가했다.

과거에는 국가가 경제에 대한 권한과 책임을 모두 가졌다면 이제는 국가 경제의 주체인 개인(가계) 기업 정부가 권한과 책임을 나눠 가졌다는 것.

우선 국가 배급제의 범위가 축소된 가운데 임금과 물가가 크게 올라 과거 일터에 나가지 않고 배급으로 생활하던 주민들이 생산 현장으로 돌아오도록 했다.

또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생산한 노동자는 더 많은 임금을 주도록 해 같은 기업소나 협동농장 노동자라도 임금 차이가 5배나 벌어졌다.

북한 당국은 이를 두고 “이제 건달군은 허용될 수 없으며 분배의 평균주의를 청산해야 한다”고 말한다.

과거 공장과 기업소는 생산품의 질에 관계없이 국가가 계획에 따라 할당한 만큼만 생산하면 됐다. 그러나 이제는 번 수입(총 판매수입에서 생활비 이외의 생산원가를 뺀 것)에 따라 평가받기 때문에 팔릴 물건을 만들어야 한다. 계획보다 더 생산하면 노동자들에게 성과급을 주는 등 자유롭게 처분도 할 수 있게 됐다.

이렇게 생산을 정상화해 ‘고난의 행군’ 시절 만연된 사경제(농민시장과 장마당)를 공식 경제 영역으로 흡수,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정상화한다는 의도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1년 10월 지침을 통해 “사회주의를 고수하면서 실리를 보장한다”는 원칙을 밝혔고 2002년 7월 1일을 기해 임금을 이전보다 평균 18배, 가격을 쌀 값 기준으로 550배 올렸다.

북한은 내부 경제 개선과 함께 신의주 및 개성특구 개방, 북-일 회담, 미일 회담 개최 등 과감한 대외 개방 조치도 단행하고 자본과 물자의 유입을 노렸다. 실제로 2002년 10월까지 북한 경제는 상당한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미 대통령 특사로 평양을 방문했던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가 10월 17일 북한 핵 보유 시인 사실을 발표하면서 분위기는 반전됐다.

2003년 3월 평양에서 만난 한 당국자는 “미국의 중유지원 중단과 남한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의 자금 유입이 줄어들면서 경제 상황이 어렵다”고 말했다.

이후 에너지와 자재 부족→공장가동률 하락→국영상점 물자 부족→농민시장과 장마당 물가 폭등이라는 부작용이 나타났다. 물가는 올랐는데 임금을 받지 못하는 주민도 있다.

이에 대해 북한 당국은 계획에 없던 수단으로 대응하고 있다. 당국은 대략 지난해 12월부터 농민시장과 장마당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고 ‘종합시장’을 운영하고 있다.

5월1일부터는 ‘인민생활공채’를 발행했다. 외부에서의 자본 유입이 중단된 상황에서 내부 자금을 모아 경제 회복에 투입하기 위해서다.

조 박사는 “북한 당국이 핵 문제 등에서 양보할 것은 빨리 양보해 외부의 지원을 받아야 경제를 더 빨리 회복할 수 있다”면서 “부분적인 사유화와 자유화 등 본격적인 내부 개혁조치도 시급하다”고 말했다.

2002년 2월과 2003년 2월 농민시장 주요 가격(단위:북한 원)
물품(단위)2002년2월2003년2월
쌀(1kg)48∼55130∼150
옥수수(1kg)20∼3275∼85
두부콩(1kg)60∼70180∼190
식용유(1kg)160∼200600∼650
달걀(1알)10∼1322∼25
돼지고기(1kg)160∼180360∼380
미원(453g, 한 봉지)180∼190420∼430
사탕가루(1kg, 설탕)130∼150400∼420
휘발유(1kg)130∼150330∼350
경유(1kg)80∼100280∼300
가루비누(중국산 450g)60∼70165∼175
담배(국산 한 갑)45∼5070∼80
담배(외국산 한 갑)100∼110230∼240
이발비(한 번)5∼1015∼20
자료:월간 탈북자들(탈북자동지회 발행) 2003년 3월호 최근 탈북자들의 증언을 종합해 작성한 것. 1달러=150북한 언.(북한 공식 환율)

신석호기자 kyle@donga.com

▼7·1 경제관리 개선조치 일지 ▼

△2001.10. 3=김정일 국방위원장, “사회주의를 개선 강화할 데 대하여” 문건 하달.

△2002. 4. 5=홍성남 내각총리, 경제관리 개선 언급. (최고인민회의 제10기 5차 회의)

△2002. 7. 1=북한 당국, 임금과 물가 대폭 인상.

△2002. 8.12=남북 당국, 제7차 장관급회담 평양 개최.

△2002. 9.17=북-일, 정상회담 개최.

△2002. 9.23=북한 당국, 신의주특별행정구 법률 공표.

△2002.10. 3=제임스 켈리 미국 대통령 특사, 평양 방문.

△2002.10.17=켈리 미 특사, 북한 핵 보유 발언 공개.

△2003. 5. 1=북한 당국, 인민생활공채 판매 시작.

△2003. 6.10=북한 조선중앙통신, 종합시장 허용과 ‘경제개혁’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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