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박영균/비서실

  • 입력 2002년 4월 19일 18시 26분


4년 전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취임한지 두 달도 채 안 되었을 무렵. 대기업들은 회장 비서실을 폐쇄한다고 잇따라 발표했다. 명분은 정부의 구조개혁조치에 따른다는 것이나 경제위기를 초래한 책임을 지고 사라진 거나 다름없었다. 대기업들엔 사실상 ‘정부의 지시’였던 셈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해 초 4대그룹 총수들은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만나 “경제위기가 초래된 데에 책임을 통감한다”며 투명한 경영풍토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비서실 해체는 그 실천이었던 것이다.

▷통상 대기업의 회장 비서실은 10여개 팀에 100여명이나 되는 대조직이었다. 회장이 계열사를 직접 챙기기 어려워지자 회장을 보좌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규모가 커지면서 조직과 권한도 막강해졌다. 처음엔 인사만 챙겼으나 기획 감사 재무 홍보 등 무소불위의 조직으로 탈바꿈한다. 일부 그룹은 정보나 능력면에서 정부조직을 능가한다는 평가도 받았다. 바로 이 비서실이 가족중심경영, 불투명경영의 ‘원흉’으로 낙인 찍혀 도마에 올랐던 것이다.

▷현 정권의 집권 마지막 해인 요즘은 사정이 한참 달라졌다. 그룹 비서실은 구조조정본부로 바뀌었고 청와대 비서실은 게이트에 얽혀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다. 대통령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비서실 참모들이 비리의혹사건에 줄줄이 연루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신광옥(辛光玉) 전 민정수석이 ‘진승현 게이트’에 연루돼 구속됐고, 공보비서관과 공보수석을 맡아온 박준영(朴晙瑩) 전 국정홍보처장이 패스21의 ‘윤태식 게이트’로 사표를 냈다. 경제복지노동특보로 복귀한 이기호(李起浩) 전 경제수석도 게이트로 옷을 벗은 적이 있다. 이런 저런 일로 사표를 내거나 구속된 사례는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힘들다.

▷이번에 김 대통령의 3남 홍걸(弘傑)씨 의혹과 ‘최규선(崔圭先) 게이트’에서도 청와대 비서관들이 여럿 등장한다. 윤석중(尹晳重) 비서관이 홍걸씨의 소송에 개입하고 5만달러를 지급하기로 하는가 하면, 최규선씨와 심야대책회의를 했던 경찰간부는 청와대에서 사정비서관을 만난 뒤 해외로 내빼는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과거 재벌 비서실을 뺨친다. 마침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에서 “청와대 비서실은 국정에 일일이 관여하는 무소불위의 기구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요지의 보고서 초안을 작성했다고 한다. 아직 재계가 정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처지라 전경련 회장단이 결정하는 최종보고서에까지 채택될지는 확실치 않으나 그간 확 달라진 청와대와 재계의 모습을 한눈에 보여주는 것 같다.

박영균 논설위원 parky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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