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태풍 시민파워/下]유권자 주권찾기 갈길 아직 '첩첩'

  • 입력 2000년 1월 27일 19시 14분


공천반대인사 명단을 발표한 뒤 총선시민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한국 정치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는 찬사를 받고 있다. 그것도 자금과 조직 등이 열악한 상황에서 ‘맨손’과 ‘의지’만으로 일궈가고 있는 운동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는 자못 큰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 결과를 헤아리기는 성급하다. 앞으로 낙선운동이 넘어야 할 벽이 많기 때문이다. 시민단체들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불가피하게 연루되거나 부작위(不作爲)에 의해 야기한 ‘명단발표 이후’의 상황은 이 점에서 반면교사(反面敎師) 노릇을 톡톡히 할 수 있다.

자민련의 음모론과 이를 둘러싼 최근의 정국 상황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번 명단작성을 민주당 일각의 음모로 치부하는 자민련은 내심 지역정서를 부추기며 은근히 최근 상황을 즐기는 눈치다. “JP에게 ‘정계은퇴’를 권유하고 자민련 의원 상당수를 명단에 포함시킨 총선연대의 낙선운동이 충청권 결집에 오히려 호재로 작용하고 있다”고 자민련 관계자들이 공공연히 언급할 정도다.

24일 명단발표 이후 조성된 정국의 난기류는 공천반대명단에 포함된 정치인들의 퇴출 문제가 아니라 자민련과 민주당의 갈등, 그리고 이 갈등이 총선에 미칠 영향 등으로 방향을 튼 느낌마저 없지 않다.

이 상황이 시민운동권에 던지는 의미는 분명하다. 우선 지역감정 문제를 넘어서지 않고는 어떤 낙선운동도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지역감정 선동을 마다하지 않는 정치권의 행태와 ‘우리 지역은 XX당 지지’라는 식으로 뿌리깊게 고착된 유권자들의 지역의식이 과연 이번엔 바뀐다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이는 어차피 시민단체들의 노력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긴 하다. 그러나 이번에 선보인 ‘유권자 100인위원회’와 같은 ‘민주적 토론’ 모델 방식은 대단히 고무적인 시도로 받아들여진다. 총선연대측에 따르면 유권자위원회의 멤버들은 토론과정에서 정치개혁과 신뢰성 있는 명단작성이라는 대의(大義)를 위해 지역감정의 소리(小利)를 벗어던지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명단발표 이후’의 상황이 보여주는 또한가지 교훈은 시민운동권이 낙선운동과 같은 ‘정치적 행위’를 할 때에는 보다 정교한 정치적 판단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가 공천반대자 명단에 포함된 경위에 대해선 총선연대측의 충분한 설명이 있었다. 또 그 진의에 대해 의심할 것도 없다.

그러나 시민운동의 입장에서 최근의 ‘소모적’이고 ‘불필요한’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김명예총재를 포함해 여야 각당의 총재 등 ‘실질적인 공천권자’들을 별도 범주로 설정해 권유의 메시지를 전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었을 법하다. 그렇게 했을 경우 음모론과 같은 것은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있었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박원순 총선연대 집행위원장이 24일 기자회견에서 김명예총재에 대해 언급하면서 굳이 ‘공천반대’라기보다 ‘공천권자’라고 표현한 것도 그같은 고려를 할 여지가 충분히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는 결국 시민운동이 정치적 행위를 할 경우 ‘진심의 무게’만으로만 덤벼들 것이 아니라 그에 걸맞게 여러가지 여파를 짚어보고 헤아리는 ‘성숙된 사고(思考)’를 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낙선운동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총선연대에 들어온 성금은 27일 현재 7000만원이 넘었다고 한다.

또 앞으로 진행될 구체적인 낙선운동 과정에서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발’도 상당히 확충 정비될 전망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지역감정이라는 외적인 장애를 극복하고 정치적 미성숙을 넘어서는 내적인 숙제, 이 양자의 해결에 좀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완배기자> roryrer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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