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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9년 6월 4일 19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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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대통령인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의 비서실은 비서관장 밑에 정무 서무 담당 등의 비서관이 있었으나 권부(權府)와는 거리가 먼 소박한 형태였다. 뿐만 아니라 편지도 직접 쓰는 이대통령의 스타일로 인해 체계적 보좌기능은 전혀 못했다는 게 ‘성공한 대통령, 실패한 대통령’을 쓴 김충남(金忠男) 전외교안보연구원교수의 설명이다.
이대통령은 대신 각 부처 장관과의 개별 면담을 거친 뒤 단독으로 정책을 결정하곤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이대통령정부를 권위주의로 흐르게 했다고 고려대 김호진(金浩鎭)교수는 분석했다.
내각제하의 윤보선(尹潽善) 대통령을 거쳐 박정희(朴正熙)대통령 시대가 열리면서 부문별 수석비서관제가 도입되는 등 현대적 의미의 비서실체제가 들어섰다. 조직적인 권력 운용도 이때부터 시작됐다는 게 고려대 함성득(咸成得)교수의 얘기다.
박대통령 초기에는 이후락(李厚洛) 비서실장이 비서실을 장악, 대통령 보좌의 전형을 마련했다고 당시 동아일보기자로 청와대를 출입했던 박경석(朴敬錫·전국회의원) 배재대 초빙교수는 말한다. 박대통령은 김종필(金鍾泌)국무총리, 공화당, 김형욱(金炯旭) 중앙정보부장 등으로 권력을 분산시킴으로써 비서실장의 권력독주를 막고 상호 견제와 균형을 이루도록 했다.
그러나 유신말기 차지철(車智澈) 경호실장이 들어서면서부터 견제와 균형 원칙이 깨져 차실장이 대통령에 대한 정보와 면담 일정 등을 독점, 박대통령은 인의 장막에 갇히게 됐고 결국 ‘10·26’이라는 비극을 맞았다.
5공의 전두환(全斗煥)대통령은 비서실 기능을 크게 약화시킨 대신 내각 각료들을 직접 상대하고 수시로 현장 점검에 나서는 등 군 지휘관같은 스타일로 권력을 운용했다.
반면 6공의 노태우(盧泰愚)대통령 시절에는 내각이 약화되고 비서실이 강화됐다. 의사결정을 주저하는 노대통령의 스타일로 인해 비서들이 대신 결정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내각이 비서관들의 눈치를 보게 됐다는 것.
노태우정부에선 비서실 등 공조직 외에 당시 ‘황태자’로 불렸던 박철언 청와대정책보좌관 (현자민련의원)과 같은 ‘막후실세’가 존재함으로써 물의를 빚기도 했다. 그래도 6공까지는 국정 전반에 대한 조정과 통제가 비교적 원활하게 이뤄졌다는 게 박경석교수의 분석이다. ‘시국대책회의’ 등 당정협의 기구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 박교수는 “김영삼(金泳三)정부 이후 그런 제도적 장치가 폐지되면서 권력 운용에 중대한 결함이 생겼다”고 지적했다.
김영삼대통령의 비서실은 작게 출발했지만 곧 기구를 확대하면서 일부 수석비서관이 대통령비서실장을 제치고 실세로 기능하는 등 무원칙하게 운영됐다. 후기에는 김광일(金光一)비서실장과 이원종(李源宗)정무수석이 갈등을 빚어 대통령이 누구의 말에 귀를 기울이느냐에 따라 정책이 오락가락했다.
김영삼정부에는 ‘소통령’으로 불리던 대통령의 차남 현철(賢哲)씨가 있었다. 공조직도 대통령보다 현철씨에게 먼저 ‘보고’하는 전근대적 현상이 벌어지면서 힘의 균형이 깨졌고 이것이 외부에는 대통령의 독선으로 투영됐다.
현 김대중(金大中)정부는 ‘작은 비서실’을 표방했지만 오히려 비서실에 권력이 집중되는 역설적 문제점을 잉태시켰다. 대통령이 국정을 ‘혼자’ 챙기다보니 항상 시간에 쫓기게 돼 최측근에 있는 비서실장이 대통령의 일정과 정보를 통제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실세로 떠오르는 것은 권력의 속성상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비서실의 보좌기능이 불충분할 경우 대통령에게 잘못된 정보를 전달해 판단을 그르치게 하는 등 오류를 낳을 가능성이 높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비서실이 저지를 수 있는 오류 가능성에 대한 견제역할을 해온 과거 안기부와 같은 기관이 지금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는 대목이다.
〈윤승모기자〉ysm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