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선거 후보검증-쟁점/서울시]국민회의 高建후보

  • 입력 1998년 5월 12일 19시 45분


국민회의 서울시장 후보인 고건(高建)전국무총리는 오랜 공직생활속에서 행정수완과 능력으로 ‘행정의 달인’이라는 평판을 들어왔다. 그러나 몸을 던져 일하기보다는 궂은 일에는 발을 담그지 않으려 한다는 점에서 보신만을 생각하는 ‘처신의 달인’이라는 비판도 없지 않다.

그는 서울출생이지만 호남으로 분류된다. 전북대총장과 6대의원을 지낸 부친 고형곤(高亨坤)박사의 고향이 전북 군산이다.

50년 경기중에 입학한 그는 6·25가 일어나자 당시 서울대 교수였던 부친을 따라 전주로 피란갔다. 마침 부친이 전주에 개설된 전시종합대학 총장을 맡게돼 전주북중에 편입, 졸업했다. 경기중에서도 동시에 졸업장을 받았다. 이어 경기고에 진학했다.

고후보는 61년 고시행정과(13회)에 합격, 내무부의 요직과 37세 최연소 도백(전남지사)을 거치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79년 10·26 당시 청와대 정무2수석비서관이던 그는 전두환(全斗煥)정권에서 교통 농수산부장관을 지냈다. 이와 관련, 그는 “헌정체제가 회복됐기 때문에 누가 하더라도 결국 나라일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초고속 출세에 따른 구설수도 적지 않아 청와대 정무2수석비서관이던 10·26 직후와 5·17때 잠시 잠적했다는 얘기도 있지만 본인은 이를 부인했다.

그는 85년 2·12총선(12대)에 군산에서 당선돼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이어 87년 5월 박종철(朴鍾哲)군 고문치사조작은폐사건 수습을 위해 단행된 개각에서 내무장관으로 입각했다.

당시 연일 명동성당 시위가 계속되자 청와대에서 경찰력을 투입해 강제해산하라는 지시가 있었으나 그는 끝까지 반대해 평화적으로 수습했다.

88년 12월 서울시장으로 다시 공직에 복귀했으나 90년 12월 청와대의 압력에도 수서택지의 용도변경을 승인하는 서류에 결재하지 않아 정권의 미움을 사면서 물러났다. 3년간 야인생활을 하던 고후보는 94년3월 명지대총장이 돼 부자(父子)총장의 진기록을 세웠다. 이어 지난해 3월 한보사태수습을 위한 개각에서 총리로 발탁됐다.

고후보는 “정권에 관계없이 직업적인 전문행정가로 봉사한다는 것을 공직 철학으로 삼아왔다”고 말했다. 공직생활에서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고 깨끗이 하며 매일 매일 새로운 자세로 일한다는 것을 신조로 삼고 있다.

선거공약으로는 △2002년 월드컵 서울상암동 주경기장 건립완수 △서울형 첨단산업육성 △서울시의 행정개혁과 각종 규제혁파 △서울의 대중교통체계 전면 재정비 △치밀한 방재대책과 과학적인 안전대책 집행 △환경 및 실업대책 마련 등을 제시했다.

〈양기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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