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인물탐구/그가 걸어온 길]忍苦의 40년

  • 입력 1997년 7월 24일 20시 00분


국민회의 金大中(김대중)총재의 일생은 그 자체가 「정치」를 위한 것이었다. 그만큼 어렸을 때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고 김총재 스스로도 밝히고 있다. 김총재는 1924년1월6일(음력 1923년12월1일)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아버지 金雲植(김운식)씨와 어머니 張守錦(장수금)씨 사이에서 4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호적상 생일은 이보다 늦은 25년12월3일. 원래 호적에는 24년1월6일생으로 돼 있었으나 김총재의 부모가 일제징용에 끌려가지 않게 하기 위해 목포상고 4학년때 호적을 고쳤다. 김총재는 하의도에서 10세때까지 서당을 다녔다. 서당에서는 줄곧 장원을 해 어머니가 2㎞나 떨어진 서당까지 머리에 떡을 이고 가 훈장선생님과 친구들을 대접한 기억이 김총재의 머리 속에 남아있다. 아들의 재능을 눈여겨 본 어머니는 그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하의도의 재산을 모두 처분, 목포로 나와 여관을 경영하며 아들을 뒷바라지했다. 김총재의 공식 최종학력은 목포상업고교 졸업. 김총재는 목포상고시절 줄곧 반장을 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그는 당시 일본인 선생이 가끔 시국에 관한 얘기를 시켜 발표하면 『대단한 식견이고 언변이다. 네말을 듣고 있으면 꼭 일본의회에서 연설을 듣는 것 같다』고 칭찬했다고 저서 「나의 길 나의 사상」에 적고 있다. 김총재는 목포상고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는 대신 사업에 뛰어들었다. 20대초반에 흥국해운이라는 해운회사를 차려 10년동안 경영했고 3년간 목포일보사 사장을 지냈다. 해운회사시절에는 상당한 돈을 벌었다고 김총재는 지금도 자랑한다. 그러다 54년 실시된 3대 국회의원 선거때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면서부터 그의 파란만장한 정치역정이 시작된다. 김총재는 자신이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6.25였다고 회고한다. 李承晩(이승만)정권의 허울좋은 「북진통일」 호언때문에 국민이 엄청난 시련을 당하고 자신도 사업이 망해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는 경험을 하면서 정치입문을 결심했다는 설명이다. 당시 김총재는 집안이 반동으로 낙인찍히는 바람에 인민군에 붙잡혀 목포형무소에 수용됐다. 이후 9.28수복때 인민군들이 후퇴하면서 수용자들을 학살했으나 80여명과 함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첫출마에서 쓴잔을 마신 김총재는 4대때인 59년6월 강원도 인제로 본적까지 옮기며 민주당후보로 출마했으나 또 낙선했다. 이어 60년7월의 5대 선거에서 세번째 낙선한 뒤 이듬해 5월의 인제보궐선거에서 비로소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삼전사기(三顚四起)」였던 셈이다. 그러나 당선 사흘후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 의원선서도 못한 채 의원직을 상실한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김총재는 6대때 목포에서 압승으로 당선,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6대 국회는 김총재에게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김총재는 젊은 나이에 본회의 최다발언을 기록하는 등 탁월한 의정활동을 펼쳐 거물정치인으로의 성장을 예고했다. 당시 김총재로부터 엄청난 공격을 받았던 朴正熙(박정희)대통령은 7대 국회의원선거에서 그를 떨어뜨리기 위해 중진이었던 金炳三(김병삼)씨를 공화당후보로 출마시키고 목포현지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등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박대통령의 의도는 실패했다. 역으로 김총재는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하게 된다. 국회의원으로 승승장구하던 김총재는 마침내 70년 金泳三(김영삼) 李哲承(이철승)의원과 함께 이른바 「40대기수론」을 주창하면서 「대선」을 향한 기나긴 등정에 나선다. 유명한 71년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막판뒤집기로 김영삼의원을 물리치고 대통령후보가 된 김총재는 71년 7대 대통령선거에서 집권의 호기를 맞았으나 박정희정권의 부정선거로 95만여표차로 패했다. 다음해 「10월유신」이 선포되면서 그는 정치규제 망명 투옥 등 기나긴 「암흑기」를 맞게 된다. 72년 이후 주로 일본과 미국 등지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반정부투쟁을 벌이던 김총재는 73년 8월 도쿄에서 중앙정보부요원들에게 납치돼 현해탄에 빠져 죽을 뻔했으나 기적적으로 생환했다. 또 全斗煥(전두환)씨 등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나 세계각지의 압력과 탄원으로 풀려났다. 군사독재정권으로부터 받은 그의 박해기록은 5년반의투옥,6년반의 가택연금, 16년간의 정치규제, 3년여의 망명생활로 정리된다. 옥중에 있을 때 그는 체계적으로 독서를 했다. 그가 다방면에 해박하다는 말을 듣고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감옥생활」을 잘 활용한 결과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오랜 망명생활을 하던 그는 85년2월 영구귀국, 김영삼씨와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하고 반독재투쟁을 벌인 끝에 「6.10항쟁」과 「6.29선언」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87년 대통령선거에서 김영삼 당시 민주당총재와 후보단일화협상에서 실패한 김총재는 평민당을 창당, 독자출마했으나 민정당 盧泰愚(노태우)후보에게 패했다. 이후 92년에도 「3당합당」을 통해 여당의 대통령후보가 된 김영삼씨에게 맞서 통합야당인 민주당대통령후보로 세번째 대선에 출마했으나 또 다시 좌절했다. 세번째 실패직후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났던 김총재는 이후 「아태평화재단」을 만들어 통일관련연구에 몰두하다 「6.27」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압승을 거두자 이를 발판으로 다시 정계에 복귀한다. 李基澤(이기택)총재가 이끄는 민주당과 결별, 적지 않은 비난을 받으면서 국민회의를 창당한 김총재는 지난해 「4.11」총선에서 제1야당으로 부상했다. 그리고 「대선 4수(修)」를 향한 본격적인 행보를 걷고 있다. 〈최영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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