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院宰기자」 전국적인 선거가 치러질 때마다 예외없이 대두되는 문제가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이다.
천문학적 규모의 선거자금이 풀리기 때문이다. 특히 선거를 앞두고 집중방출되는 현금통화와 인플레 기대심리는 총통화증가율을 끌어올리고 거센 물가상승압력을 수반한다.
선거 때 나타나는 또하나의 부작용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기업의 설비투자가 둔화되는 경향이다.
지난 92년 대선이 있던 분기와 다음 분기의 설비투자증가율을 보면 각각 마이너스 10.2%와 마이너스 12.4%로 매우 저조했다.
선거가 끝나면 통화당국은 다시 현금통화를 환수하는 등 경제의 주름살을 펴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만 선거로 인한 거시경제의 교란을 완전히 제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지난 87년 대선 때의 총통화증가율을 보면 9월의 17.7%에서 선거가 실시된 12월에 22.5%로 치솟았다. 당시 정치권과 경제계에서는 대선자금 총액이 1조원을 웃도는 것으로 추정했다.
당시 선거가 끝난 뒤 선관위에 신고된 액수는 △盧泰愚(노태우)후보 1백30억원 △金泳三(김영삼)후보 53억원 △金大中(김대중)후보 48억원 △金鍾泌(김종필)후보 16억원 등 법정 한도액(1백39억원)을 훨씬 밑돌았다.
그러나 이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당시 노후보의 경우 全斗煥(전두환)당시 대통령의 지휘아래 민정당과 사조직은 물론 행정조직까지 동원된 필사적 선거전을 펼치면서 경제계의 추정대로 1조원이 넘는 선거자금을 썼다는 게 정설이었다.
92년 대선자금규모는 지금도 정치쟁점중의 하나로 남아 있다. 당시 김영삼후보는 법정한도액(3백67억원)을 밑도는 2백84억원을, 김대중후보는 2백7억원을 신고했다. 그러나 경제계에서는 당시 각 후보들이 쓴 대선자금 총액을 1조∼2조5천억원으로 추정했다.
선거가 끝난 뒤 묻혀버렸던 대선자금 문제가 또다시 정치적 이슈로 대두된 것은 지난 95년 노태우 비자금 사건 때였다. 당시 노씨가 재임중 수천억원을 기업으로부터 거둬들였고 상당부분을 정치자금으로 사용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야권에서는 즉각 『92년 대선 때 노씨가 수천억원을 지원했고 민자당의 김영삼후보 캠프는 1조원을 넘게 썼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물론 김영삼대통령은 『나는 노씨로부터 한푼도 직접 받은 일이 없다』고 부인했으나 불씨를 완전히 끄지는 못했다.
지난해 4.11 총선 때도 「92년 대선자금」 문제는 주요 쟁점이 됐고 앞으로도 언제 다시 불거질지 모르는 「미제(未濟)현안」으로 남아 있는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