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엔 안마사 낮엔 마라토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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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2월 16일 09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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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둘 셋 넷, 둘둘 셋 넷”

오전 10시 서울 남산순환로에 위치한 ‘남산녹색체육관’ 앞. 운동복을 입은 사람 20여 명이 원을 그리고 서서 구호에 맞춰 무릎돌리기, 제자리뛰기 등의 준비운동을 했다. 그 중 몇몇은 움직임이 조금 어색해 보였다. 입에서 하얀 입김이 연기처럼 나왔다. 그들은 2인 1조로 서로를 연결해주는 1m 남짓한 끈을 팔뚝에 묶었다. 그리고는 영하의 날씨 속에 텅 비어있는 남산순환로를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VMK 한국시각장애인마라톤’ 동호회 소속 시각장애인과 이들의 내비게이션이 되어주는 마라톤 도우미 자원봉사자모임 ‘해피레그’ 봉사자들은 매주 화, 토요일 마다 남산에 모여 2시간씩 달리기 연습을 한다. 이들의 목표는 마라톤 완주다.

7년째 동호회를 이끌고 있는 유정하(64) 씨 역시 1급 시각장애인이다. 그는 눈앞의 희미한 불빛을 쫓아 지금까지 런던, 베를린, 보스턴 등 세계 5대 마라톤대회를 포함한 풀코스 16회, 하프코스 99회를 완주했다.

“마라톤은 집안에만 있는 시각장애인들을 밖으로 끌어낼 수 있는 역할을 해요. 집에만 있으면 잡념이 많이 생기게 되고 도박에 빠지기도 하는데 그런 것들을 생각할 수 없게 하죠.”

마라톤은 집밖으로 나온 시각장애인을 그들만의 울타리에 가두지도 않는다는 것이 유 씨의 주장이다.

“일반인들이 끈 한번만 잡아주면 금방 형, 동생, 누나, 오빠사이가 되요. 나와 일반인들의 경계가 사라진다는 점이 마라톤하면서 가장 좋은 점이에요.”

앞이 보이지 않는 이들도 가끔 ‘한 눈’을 팔 때가 있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하다보면 도우미의 말을 놓쳐 턱에 걸리거나 구덩이를 밟고 넘어지는 경우가 생긴다.

“특별히 위험했던 순간은 없는데 한 대회에서 하프코스를 뛰다가 3번을 넘어진 적이 있어요. 그땐 도우미가 좀 야속하더라고요.”

하지만 시각장애인은 뛰고 싶다고 모두 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앞을 볼 수 없는 그들에게 ‘달리기’는 도우미(가이드 러너)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회원 40여명의 ‘해피레그’ 운영자 김용열(48) 씨는 6년째 그들의 매니저 역할을 도맡고 있다. 마라톤 연습을 위해 남산순환로를 뛰다 시각장애인 마라토너를 만나게 된 것이 계기였다.

“시각장애인들이 지방마라톤대회에 출전하게 되면 그 지역 마라톤 동호회 사람들에게 도우미로 뛰어달라고 부탁하는 일이 임무에요. 아마추어 마라토너라도 기록에 대한 욕심들이 있기 때문에 도우미를 구하기가 쉽진 않아요.”

매주 마라톤을 연습하는 시각장애인들에 비해 대회 출전자 수가 적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도우미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모일만한 장소라고는 탈의실도 없는 가건물 체육관이 전부고 도우미 없이는 뛸 수도 없지만 시각장애인들의 도전은 계속된다. 유 씨는 오는 27일 중랑천마라톤대회에 참가해 100번째 하프코스 마라톤을 완주할 계획이다. 이날은 그에게 가장 많은 도움을 줬던 도우미 4명이 번갈아가며 파트너로 뛸 예정이다.

임광희 동아닷컴 기자 oasi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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