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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7년 9월 29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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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당시 해병대는 서해안의 전략도서 확보를 위해 진남포 앞바다의 석도와 초도(:島), 호도에 1개 대대 규모의 병력을 배치했다. 이 섬들은 서해지역의 북한군 동향을 감시하고 해상 침투를 저지하는 군사 요충지였다. 북한군은 국군이 주둔 중인 서해 도서들을 ‘눈엣가시’로 여겨 수시로 기습을 감행해 양측 간 교전이 빈번했다.
1952년 3월 25일 북한군 1개 중대가 석도 일대의 전초기지인 호도를 기습했다. 당시 섬에 주둔 중이던 해병대 장병 40여 명과 미 8군 소속 첩보부대원 20여 명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끌려갔다. 전쟁통이라 당시 전사자들의 유해는 대대본부가 있던 석도로 옮겨져 가매장됐다. 당시 “나무 묘비를 보는 순간 말로만 듣던 호도 전투 희생 장병들의 것임을 직감했다”는 윤 소위의 마음엔 금방 그늘이 깔렸다. 며칠 뒤면 정전협정 체결에 따라 국군은 석도를 비롯해 서해 북방한계선(NLL) 이북의 서해 도서에서 모두 철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윤 소위는 통일이 되면 다시 석도를 찾아가 전우들의 유해를 찾아 봉환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묘소의 위치를 수첩에 상세하게 그려서 간직했다. 그러나 미군 상륙함을 타고 철수한 뒤 부산에서 근무하던 중 수첩을 잃어버렸다. 군에서도 호도 전투와 희생자들은 잊혀져 갔다. 국방부에 확인한 결과, 호도 전투에 관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윤 이사장에게는 그들을 이북의 서해 도서에 남겨 두고 온 게 평생 마음의 짐이 됐다.
“반세기 넘게 이북 서해의 외딴 섬에, 묘지도 아닌 곳에 잠들어 있을 동료 장병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 옵니다.”
군 일각에선 다음 달 2일부터 열리는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남포, 해주 등에 제2개성공단 조성이 추진되면 석도 등 일대 도서의 개발도 이뤄져 이곳에 묻혀 있는 국군 전사자들의 유해를 영원히 찾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도 적지 않게 나오고 있다.
윤 이사장은 “미국은 50년이 지나서도 북한에 들어가 미군 유해를 찾아오는데, 호도 전투처럼 ‘잊혀진 전투’에서 전사한 뒤 북한지역에 묻혀 있을 국군 유해 발굴과 포로 송환 문제를 정상회담에서 본격 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상호 기자 ysh100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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