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양중 일민문화재단 이사장 “북녘 섬에 잠든 전우에 꽃 한송이 바쳤으면”

  • 입력 2007년 9월 29일 03시 03분


《6·25전쟁 정전협정 체결 직전인 1953년 7월 중순경. 해병대 장교(해군간부 8기)로 참전한 윤양중(75·일민문화재단 이사장·사진) 소위는 북한 평남 진남포(현 남포) 앞바다의 석도(席島)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있었다. 석도 대대에서 해병대 정훈관으로 근무하던 윤 소위는 지뢰 제거작업 도중 사고로 숨진 장병의 시신을 묻기에 적당한 장소를 찾는 중이었다. 섬의 한편에서 20여 개의 낮은 봉분과 나무 묘비를 발견한 그는 가슴이 철렁하는 기분을 느꼈다. 6·25전쟁의 ‘잊혀진 전투’ 가운데 하나인 호도(虎島) 전투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나무 묘비에는 전투 희생자들의 이름과 군번, 소속 등이 새겨져 있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당시 해병대는 서해안의 전략도서 확보를 위해 진남포 앞바다의 석도와 초도(:島), 호도에 1개 대대 규모의 병력을 배치했다. 이 섬들은 서해지역의 북한군 동향을 감시하고 해상 침투를 저지하는 군사 요충지였다. 북한군은 국군이 주둔 중인 서해 도서들을 ‘눈엣가시’로 여겨 수시로 기습을 감행해 양측 간 교전이 빈번했다.

1952년 3월 25일 북한군 1개 중대가 석도 일대의 전초기지인 호도를 기습했다. 당시 섬에 주둔 중이던 해병대 장병 40여 명과 미 8군 소속 첩보부대원 20여 명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끌려갔다. 전쟁통이라 당시 전사자들의 유해는 대대본부가 있던 석도로 옮겨져 가매장됐다. 당시 “나무 묘비를 보는 순간 말로만 듣던 호도 전투 희생 장병들의 것임을 직감했다”는 윤 소위의 마음엔 금방 그늘이 깔렸다. 며칠 뒤면 정전협정 체결에 따라 국군은 석도를 비롯해 서해 북방한계선(NLL) 이북의 서해 도서에서 모두 철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윤 소위를 비롯한 대대 장병들은 전사자들의 유해를 거둘 수 없었다. 슬픔을 억누르며 가매장지가 적에게 발견되지 않도록 나무 묘비를 뽑고 봉분을 평평하게 만들었다.

윤 소위는 통일이 되면 다시 석도를 찾아가 전우들의 유해를 찾아 봉환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묘소의 위치를 수첩에 상세하게 그려서 간직했다. 그러나 미군 상륙함을 타고 철수한 뒤 부산에서 근무하던 중 수첩을 잃어버렸다. 군에서도 호도 전투와 희생자들은 잊혀져 갔다. 국방부에 확인한 결과, 호도 전투에 관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윤 이사장에게는 그들을 이북의 서해 도서에 남겨 두고 온 게 평생 마음의 짐이 됐다.

“반세기 넘게 이북 서해의 외딴 섬에, 묘지도 아닌 곳에 잠들어 있을 동료 장병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 옵니다.”

군 일각에선 다음 달 2일부터 열리는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남포, 해주 등에 제2개성공단 조성이 추진되면 석도 등 일대 도서의 개발도 이뤄져 이곳에 묻혀 있는 국군 전사자들의 유해를 영원히 찾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도 적지 않게 나오고 있다.

윤 이사장은 “미국은 50년이 지나서도 북한에 들어가 미군 유해를 찾아오는데, 호도 전투처럼 ‘잊혀진 전투’에서 전사한 뒤 북한지역에 묻혀 있을 국군 유해 발굴과 포로 송환 문제를 정상회담에서 본격 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상호 기자 ysh100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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