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용 연세웰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어제는 진짜 피곤해서 정말 잠들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침대에만 누우면 확 깨고, 결국 또 온갖 걱정들에 밤새 못 잤어요. 약을 늘려야 하는 것 아닐까요?”
진료실에서 수없이 듣는 이야기다. 종일 업무와 일상에 시달려 녹초가 됐음에도 잠들지 못한다. 몸을 더 피곤하게 하면 잠들까 싶어 격렬한 운동을 해봐도 마찬가지다. ‘지금이라면 바로 잠들 수 있겠다’는 생각에 불을 끈 순간, 도리어 눈이 번쩍 뜨인다. 낮에 부장님이 지었던 미묘한 표정, 동료에게 무심코 던졌던 한마디가 머릿속을 헤집기 시작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걱정이 이어지며 잠은 더 멀리 달아난다. 수많은 이들이 경험하는 이 고통스러운 현상은 단순히 예민하거나 의지력이 약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취침 전 인지적 각성’이라고 부르는 뇌의 작용이다.
왜 하필 잠들기 직전에 걱정이 쏟아지는 것인지에 대한 뇌과학적 이유들이 있다. 첫째, 외부 자극의 차단이다. 쏟아지는 정보들을 처리하느라 조금 전까지도 종일 바쁘게 활동했던 뇌로서는 갑자기 어두워지며 사라진 외부 자극들에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갈 곳을 잃은 인지적 자원들이 내면의 사소한 고민으로 향하게 된다. 낮에는 태양빛에 가려 보이지 않던 별들이 밤이 되면 선명해지는 것과 같은 원리다. 이때 우리 뇌의 본능은 긍정보다 부정적 신호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돼 있는데, 이 때문에 미해결된 온갖 고민거리를 무한 반복하며 불안을 키우고 신체를 각성시킨다.
다음으로 ‘위협 탐지 모드’가 켜지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에서 아주 오랫동안 밤은 포식자의 공격에 가장 취약한 시간이었다. 생존을 위해 잠들기 전 주변의 위험 요소를 경계하던 본능이 현대인의 뇌에도 남아 있다. 그런데 오늘날의 맹수는 호랑이가 아닌 사회적 평판이나 경제적 안정이다. 정답과 실체가 없는 위협이기에 더 해결되지 않는다. 과거처럼 돌아가며 불침번을 서는 가족과 동료에게 내 안전을 맡기고 잘 수도 없다. 해결되지 않은 위협이 바로 옆에 존재하는 가운데 잠드는 것을 우리 뇌가 허락하지 않는다.
이럴 때 ‘그냥 생각하지 말자’라는 방식은 통하지 않는다. 뇌가 걱정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중요한 문제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잠들기 한두 시간 전, 머릿속 걱정거리와 내일 할 일을 노트에 직접 적어보는 것이 상당히 효과적인 경우가 많다. ‘이 정보는 안전하게 기록됐으니 더 이상 되새길 필요가 없다’고 뇌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인지적 셔플’ 기법으로 뇌를 혼란시키는 것 역시 방법이다. 걱정 시나리오가 이어지지 않도록 무작위 이미지를 뇌에 주입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오리, 오리너구리, 오징어’ 등의 특정 단어로 시작하는 단어들을 떠올리며 그 이미지를 아주 느리고 선명하게 그려본다. 이 그림들이 뇌를 채우며 기존의 걱정들을 밀어내고 자연스럽게 수면 모드로 진입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지금 당신의 불면은 뇌가 주인을 지키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한 결과물일 수 있다. 지나치게 몸을 혹사시키거나 바로 수면제를 먹기보다 다른 방식의 시도를 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김지용 연세웰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은 2017년 팟캐스트를 시작으로 2019년 1월부터 유튜브 채널 ‘정신과의사 뇌부자들’을 개설해 정신건강 정보를 소개하고 있다. 4월 기준 채널의 구독자 수는 약 31.2만 명이다. 에세이 ‘빈틈의 위로’의 저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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