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 출범 후 진행된 대미 협상에는 일련의 패턴이 있다. 미국이 깜짝 발표(주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를 하면, 청와대가 급한 불을 끄려 장관급 인사들을 ‘급파’한다. 비장한 표정으로 방미 길에 오른 인사들은 상대를 만나고 나와 “우리 측의 이야기를 잘 설명했고 미국을 이해(또는 설득)시켰다”고 전한다. 사태의 엄중함을 강조하면서 말이다.
지난달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산 25% 관세 재인상을 ‘통보’했을 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잇따라 산업통상부 장관과 통상교섭본부장, 외교부 장관이 미국으로 향했다. 결과는 ‘빈손 귀국’이었다. 설득에 실패한 장관들은 화살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국회에서 대미투자특별법 통과가 지연되고 있기 때문”(김정관 산업부 장관), “미국이 우리의 제도와 시스템이 자신들과 다른 부분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는 식이었다. 일이 이렇게 된 건 우리(정부) 문제가 아니라 국회 탓이고 미국의 무지와 오해 탓인 셈이다.
반면 외교안보 라인은 다른 진단을 내놨다. 조현 외교부 장관은 9일 대정부 질문에서 방미 중 만난 제이미슨 그리어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가 “비관세 장벽 협상에 진척이 없으면 관세 인상으로 무역적자를 개선하려 한다”고 했다고 말했다. 비관세 장벽 문제가 관세 인상의 주요 원인 중 하나라는 뜻이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보란 듯 “관세 합의가 흔들린 영향이 안보 분야에도 미친다”고 했다. 통상 라인의 관세 합의 관리 실패를 작심하고 지적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가운데, 김 장관은 “법안이 통과되면 관세 재인상은 정상화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진단들이 제각각인 건 책임을 외부로 미루고 있기 때문이다. 국회가, 한미 간 제도의 차이가, 비관세 장벽이 상황을 악화시켜 어쩔 도리가 없다는 논리다. 때마침 12일 파행된 국회 ‘대미투자특별법 처리를 위한 특별위원회’는 그런 책임 회피에 불을 붙일 좋은 땔감이 된다. 미국의 청구서는 계속 달라지고 압박이 거세지는데 누구도 정책적 책임을 지지 않는 구조가 돼 가고 있다.
책임을 외부로 돌려 위기를 모면하고, 다시 상대로부터 ‘어퍼컷’을 맞고 수습하는 악순환을 끊으려면 정부 당국자들이 한자리에 앉아 현 상황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고위직이 줄줄이 급파돼도 상황 전개를 막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다다른 이유가 정말 법안 때문만인지 냉철하게 되돌아봐야 한다. 남 탓을 하는데 탓하는 이유들도 다르다 보니 협상 상대에겐 ‘내부 합의도, 공유도 안 되는 정부’로 비칠 수 있다. 그런 자중지란이 관세 폭탄보다 더 위험하다.
한미 정상 간 합의인 조인트 팩트시트(JFS·공동 설명자료)를 도출하기까지 수개월간 분야별로 협상을 해왔더라도, 후속 조치를 이행할 땐 통상과 외교가 ‘이인삼각’으로 임해야 한다. 필요하면 한미 간 ‘외교·통상 장관 2+2회의’ 같은 형식도 염두에 둬야 한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한 트럼프 대통령의 돌발 통보는 이미 상수가 된 지 오래다. 예측 불가능성마저도 예측하고 대응하는 것이 통상외교의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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